<수중 용접공> _자기연민에 빠진 남성을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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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있다. 한 인물의 인생을 모조리. 현실에서는 이러한 결정적 순간이 극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독자를 매혹시켜야 하는 이야기에서는 반드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 소개할 <수중 용접공>도 그렇다. <수중 용접공>에서는 보물선이 마을 근해에 가라앉았다고 굳게 믿는 주인공의 아버지가 있다. 잠수사인 그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가족을 팽개치고 보물찾기에 몰두한다.

 

아버지 죽음
아버지의 죽음

주인공 ‘잭’이 10살이 되던 해, 할로윈 데이. 결정적 사건이 발생한다. 그날 밤 주인공 아버지는 바다에서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은 주인공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다. 그것은 20여 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주인공 잭을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처럼 바다에 집착하며 심해에 일하는 수중 용접공이 된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회피한다. 하지만 결국에는 진실을 직시해야만 하는 순간들이 오기 마련이다. 아버지처럼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는 것을 앞둔 시기, 그는 바다 속에서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계’의 환상을 보게 된다. 이야기의 전환점이 발생하는 순간이다. 주인공 잭에게 목표가 생기고, 그의 여정을 가로막는 장애가 명확해진다. 마침내 그는 시계의 환상을 통해 그동안 회피했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기 시작한다.

 

환상 2

환상 4
환상을 보기 시작하는 잭

 

 

어떤 성장이어야 하는가
<수중 용접공>은 아버지의 죽음을 극복하는 주인공 잭의 성장 드라마다. 그는 환상의 경험을 통해 과거의 기억 속으로 침전해 들어간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과거의 사건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잭은 과거의 자신과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낸다.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아들을 환하게 바라보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보면 주인공의 성장이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불편하다. ‘성장했는가’라는 ‘결과’가 아닌 ‘어떻게’ 성장했는가라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주인공 잭은 아내가 임신한 이후로 줄곧 어디론가 도망치듯 행동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시계의 환상을 보면서부터, 마치 보물의 환상에 집착해 가족을 버린 아버지처럼, 만삭의 아내를 방치한다.

 

아내 갈등 2
현실로부터 도피하면서 만삭의 아내마저 방치하는 잭

 

 

자기 연민에 빠진 남자
선택은 인물의 변화, 즉 인물의 성장을 보여주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하지만 주인공 잭의 경우 작품 내내 과거의 기억에 억눌린 채 인물의 변화를 수반하는 선택과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진 평면적이고 예측 가능한 인물이다. 물론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결정적 사건이다. 하지만 어두운 과거는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생각과 행위를 이해하도록 만들어주는 수단이지, 그의 엇나간 행동을 정당화시켜주는 수단은 아니다.

 

아버지 2
어느새 잭은 그토록 피해왔던 아버지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많은 인물들은 어두운 과거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망가진 것은 아니다. 또한 설사 망가지더라도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다른 모습, 즉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하지만 주인공 잭은 유감스럽게도 성장은 하되, 더 나은 성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출산을 앞둔 아내의 간절한 요청에도, 시계의 환상을 확인하러 기어코 한밤중 바다 속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모든 일을 수습하는 것은 온전히 아내의 몫이다. 그녀는 신속히 구조 요청을 하고, 덕분에 잭은 목숨을 건진다. 또한 그녀는 갑작스러운 출산의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여 자신과 아이의 목숨을 구한다. 이렇게 무책임한 행동으로 일관하는 주인공에게 온전히 몰입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자기 연민에 도취된 남성일 뿐이다. 가족의 희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아픔만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무게를 가진다. 결국 그는 단지 아버지를 닮은 또 다른 아버지가 되어 있을 뿐이다.

심해와 무의식과 은유. 과거 기억의 파편이 교차되는 초현실적 장면. 그리고 아버지에서 아이로 이어지는 인생유전(人生流轉). 마지막으로 불안한 내면과 흔들리는 환상을 적절하게 담아내는 작가의 거친 펜선. 여러 매체에서 언급된 최고의 만화라는 수식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의례적 찬사보다, 조금은 예민한 시선에서, 어쩌면 사소해 보일지도 모를 그런 이야기를 하려 했다.

우리는 그동안 어처구니없는 ‘자기 연민에 빠진 남성’들을 지겹게 보아왔다. 현실에서도, 많은 작품 속에서도. 어떤 캐릭터를 반드시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을 공감할 수는 있어야 한다. 자기 연민에 빠진 남성은 지금 이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구시대적 캐릭터다. 그들은 그 자체로도 문제적이지만, 그들 맞은편에는 항상 희생당하는 여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는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문제적 남성 캐릭터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대신 보다 다채로운 방식으로 성장하는 남성 캐릭터들이 많은 작품 속에서 재현될 필요가 있다. 이 과제는 앞으로, 작품을 생산할 작가의 몫이며 동시에 작품을 소비할 독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