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과 창작, 다른 두 세계의 차가운 실체_ <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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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문서 파일을 연다. 한동안 빈 공간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한 글자 한 글자씩 써내려간다. 그러다 이내 미간이 찌푸려지고 애써 쓴 내용을 지워버린다. 심호흡을 한 후 다시 한 번 공간을 채워나간다. 이제까지 써온 내용들을 읽어보며 생각을 정리한다. 그대로 넘어갈 때도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을 지워버리고 머리를 쥐어뜯을 때도 있다. 그만큼 글로써 생각을 표현한다는 것, 나아가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 ─때때로 다량의 카페인과 당분까지─을 요구하는 중노동이다. 출산의 고통과도 비교되는 창작에 대한 고통을 감내하면서 ‘작가’가 얻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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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가공되지 않은 아이디어와 다듬어지지 않은 단어의 배열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다듬고 정렬하여 하나의 관통하는 세계를 만드는 일은 결코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처음 <월즈>를 접했을 때에도 이러한 고민과 맞부딪혔다. 이 작품에 대하여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 우선 제목을 보자. 글(words) 그리고 세계(worlds), 한국인의 무딘 발음으로는 둘 다 ‘월즈’라고 들린다. <월즈>의 세계 또한 글로써 존재하는 종이세계와 현실세계가 공존한다. 이 작품의 이름이 <월즈>인 것은 현실과 창작의 경계를 차마 허물 수 없었던 작가의 오랜 고민 끝에 정해진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현실세계와 가상의 종이세계
이야기(words)가 곧 세계(worlds)가 되는 종이세계. 그곳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가시밭 숲 마법사의 이뤄지지 못한 사랑은 하나의 세계를 태워버리고 또 다른 세계를 만들어간다. 그렇게 만들어진 종이세계에서 자아를 가지고 움직이는 ‘써머’와 ‘윈터’는 종이세계의 지배자 ‘까마귀’와 거래를 하고 독재자 ‘마라스’의 목숨을 제물로 종이세계에서 죽어나간 이들의 부활을 바란다. 모두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종이세계는 무참하게 그어지는 빨간 선으로 황폐해지고, 빨간 선은 작가 길릭으로 이어지면서 무대는 현실세계로 돌아온다. 그러나 종이세계에서 전능해 보이는 작가 길릭의 현실은 종이세계와는 반대로 차갑기만 하다. 친구 강명의 소개로 가까스로 시작한 작품의 출판은 결국 족쇄가 되어 그를 옭아맸다. 출판을 도왔던 회장 ‘마라스’의 강압으로 잔혹동화를 집필하게 된 길릭의 손에서 종이세계는 다시 살아 움직이지만 그 세계는 어딘가 기괴하고 암울하며 희망이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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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이라는 이름 하에 그어지는 빨간 선에 의해 죽어가는 인물들

 

<월즈>를 웹툰으로 먼저 접하게 된 것은 매우 아쉽다. 묵직한 출판본으로 먼저 접했더라면 그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픽노블처럼 밀도 있고 진중한 그림체와 독특한 세계관을 즐기기에 매주 기다려야 하는 웹툰의 방식은 너무나 감질난다. <월즈>의 서사 구도나 세계에 대한 연출 그리고 인물간의 관계까지 무엇 하나 가볍지 않고 하나의 세계를 대함에 있어서 느껴지는 무게감 또한 남다르다. 길릭의 현실과 그의 종이세계는 평행우주와도 같은 기시감을 주면서 두 가지 세계에 대해 더욱 더 알고자 하는 갈증을 유발한다. 길릭과 써머, 윤혜와 윈터, 그리고 양 쪽 세계의 악인 마라스. 이들의 인연이 앞으로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인가 손에 땀을 쥐며 다음 화를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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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스’의 강압으로 잔혹동화의 집필을 시작하는 ‘길릭’

 

창작의 원동력은 대부분 현실도피와 현실부정에서 시작된다. 현존하는 시스템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은 세상을 리셋시키는 재난만화를 그려내고 부정부패와 부조리에 진저리가 난 작가들은 초능력을 가진 영웅들을 탄생시켜 도시의 질서를 바로잡는다. 그러나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한 창작이 아닌 현실과 다를 바가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기에 <월즈>의 두 세상은 어찌 보면 현실보다도 더 차갑고 두려우며 잔혹하고 또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