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만화, 순정만화, 그리고 여성만화

백혜경_남친있음

소녀만화(少女漫画)를 폭넓게 정의하면 그 이름대로 미성년 여성 독자를 주 소비층으로 설정하고 제작되는 만화 전반을 의미한다. 또한 일본에서 발생, 성장한 소녀만화 특유의 미학적 양식, 세부 장르 등을 포괄한 만화 분류를 지칭하기도 한다. 즉 여전히 잡지연재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일본 만화산업 내에서는 <나카요시(なかよし)> <하나토유메(花とゆめ)> 등 소녀만화 잡지에서 연재되는 만화 전반을 의미하기도 하면서, 그런 잡지에 연재되지 않더라도 미성년 여성 독자를 타깃하면서 ‘소녀만화’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그림체, 연출, 전개, 장르를 따르는 만화 역시 소녀만화로 분류할 수 있다. 일본의 만화산업이 세계적으로 이례적인 수준의 규모를 갖춘 만큼 일본 만화산업의 중대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소녀만화 역시 세계적으로 독특한 대규모의 여성향 만화시장을 형성하여 자국은 물론 해외로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1. 소녀만화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소녀만화의 특징은 미려하거나 귀엽게 양식화된 그림체, 독백이나 대담한 컷 사용 등 각종 효과를 이용한 섬세한 심리묘사, (보통 어시스턴트나 문하생의 도움을 받아) 사실적으로 그려지는 남성향 극화만화의 배경과는 대조적으로 간략하게 그려지거나 생략된 배경 묘사, 그리고 연애가 핵심을 이루는 스토리로 인식한다. 물론 이런 특성들은 소녀만화를 논할 때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이기는 하나, 그것만으로는 소녀만화를 전부 아우를 수 없다. 소녀만화의 태동기에는 연애물이 아니라 궁핍한 환경 속에 고생하는 착한 소녀 주인공, 생이별한 부모와 자식, 출생의 비밀에 대한 멜로드라마적 가족만화, 신파극이거나 말괄량이 소녀의 생활을 익살스럽게 그린 일상 개그 만화가 주를 이루었다. 또한 연애가 서브플롯에 불과하거나 아예 다뤄지지 않는 추리, 모험, 호러, 스포츠 작품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소녀만화의 연애도 이성애에 국한되지 않고 양성애와 동성애를 다루기도 하며 그로부터 아예 새로운 장르가 파생되기도 했다. 확실히 ‘아름다움’은 여전히 소녀만화의 중요한 정체성이지만, 드물게 미형과는 거리가 먼 외모의 캐릭터가 주인공을 맡는 경우도 없지 않다.

또한 소녀만화, 순정만화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 중 하나는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만화”라는 점이다. 분명히 소녀만화, 순정만화 작가의 대다수는 여성이며, 여성의 창작자와 소비자로서의 주체성 면에서 소녀만화는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성 작가를 무조건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작가의 성별을 이유로 그가 그린 소녀만화를 가리켜 소녀만화가 아니라고 한다면, 소녀만화의 성립에 있어서 막중한 역할을 한 데즈카 오사무의 <리본의 기사(リボンの騎士)>를 소녀만화로 인정하지 않는 결과를 낳게 된다. 또한 한국, 일본 만화산업 초창기의 작가들이 대다수 남성이었기에 초기 소녀만화, 순정만화 작가들 역시 남성이 대부분이었으며, 이들의 작품을 보고 자란 여성 독자들이 여성 작가로 성장해 자신들이 보고 자란 소녀만화, 순정만화로부터 받은 영향이나 반발에서 비롯된 창의성으로 새로운 경향의 작품을 제작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소녀만화, 순정만화의 창작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며 여성 독자를 위해 제작된 만화라는 점을 핵심적으로 받아들이되, 창작자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점이 소녀만화를 성립시키는 필수조건이 될 필요는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소녀만화의 정체성과 다양성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소녀만화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보아야 한다.

 

(1) 소녀만화의 기원: 소녀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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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간행된 나카하라 준이치의 <소녀의 벗(少女の友)> 삽화 및 표지 일러스트 수록집. 나카하라는 1932년부터 1940년까지 잡지 <소녀의 벗> 전속 삽화가였다.

소녀만화의 탄생은 다이쇼 시대(1912~1926) 일본 소녀잡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 시기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반사 이익으로 일본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대중문화가 번성해 많은 출판물이 간행되었다. 또한 사회적으로는 여성운동이 활발해지고 여아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다수의 소녀잡지가 창간되었다. 소녀잡지는 해외 영화 소개, 발레에 관한 기사, 타카라즈카 기사, 그리고 아르누보와 아르데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미려한 일러스트가 삽입된 서정적인 소녀 소설을 게재해 화려하고 세련된 ‘소녀향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현재까지도 ‘소녀만화’라는 개념에 얽혀 있는 어떤 상투적인 시각적 이미지, 즉 마치 별이 반짝이는 것 같은 예쁜 눈망울, 가늘고 길게 뻗은 우아한 신체, 섬세한 선, 서정적인 분위기, 실제와 상상 속의 서구가 조합된 독특한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과 이국성(exotism), 세련되고 화려하게 그려진 옷차림, 꽃이나 반짝임 등 각종 장식적 소품과 연출로 강조되는 전반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미학적 집착에는 사실 나카하라 준이치를 비롯한 30년대 소녀잡지의 인기 삽화가들의 영향이 강하게 드리워져 있다. 후에 ‘백합(百合)’으로 분류되는, 여성들 사이의 동성애나 동성애적 감정을 아름답게 묘사하는 장르도 그 뿌리를 소녀잡지의 소설과 삽화에 두고 있다. 이렇게 소녀잡지를 통해 성립된 소녀향 대중문화와 소설 삽화들은 소녀만화가 싹 튼 토양이자 틀이 되었다.

또한 소녀잡지에는 최초의 소녀만화, 즉 소녀 독자들을 위해 제작된 만화들이 게재되어 현대 소녀만화의 시초가 되었다. 1935년 <소녀구락부(少女倶楽部)>에 연재된 쿠라카네 쇼스케의 <도리짱 만세(どりちゃんバンザイ)>와 1938년부터 <소녀의 벗>에 연재된 마츠모토 카츠지의 <빙글빙글 쿠루미짱(くるくるクルミちゃん)>이 그런 초기의 소녀만화 작품이었다. 초기 소녀만화들이 특징은 미국 카툰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그림체의, 1컷이거나 비교적 단조로운 컷 구성의 일상 배경 개그 만화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그와 익살에 집중된 특징은 당시 만화들의 전반적인 공통점이라 시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성인이나 소년을 위한 만화들과 명백히 차별화된 점이라면 소녀 독자들이 호감과 공감을 느낄만한 소녀 주인공들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특히 <빙글빙글 쿠루미짱>에서 괄목할만한 점은 소녀만화의 핵심적인 전형(典型) 중 하나인 ‘활동적인 말괄량이 여주인공’의 등장이다. 쿠루미는 머리에 리본을 달고 치마를 입은 전형적인 ‘소녀다운’ 모습이지만, 당시엔 전통적으로 남성이 우수한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공부와 운동 능력도 남학생보다 뛰어나며, 상대가 어린 여자아이라고 얕보는 성인 남성들을 대담한 재치와 장난기로 깜짝 놀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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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글빙글 쿠루미짱> 마츠모토 카츠지, <소녀의 벗> (1938년 1월). 캐릭터 상품으로도 장기간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다소곳한 귀여움이 강조된 상품과 원작 만화 사이의 괴리감이 상당히 크다.

 

즉 소녀잡지에는 ‘(이국적인) 탐미성’과 ‘활동적이고 주체적인 (말괄량이) 여성 주인공’이라는 소녀만화의 핵심 요소들이 존재했다. 하지만 30년대 후반부터 군부의 대두와 중일전쟁 이후 가속화된 언론 탄압으로 다수의 잡지들이 폐간하거나 검열 받으면서 소녀잡지 역시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군부가 요구하는 ‘일본적인’ 여성관, 즉 가부장적 권력에 순종적인 현모양처상(像)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나카하라 준이치의 그림은 서구적이고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1940년을 기점으로 <소녀의 벗> 지면에서 퇴출당했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비로소 언론의 숨통이 트이고, 폐간된 소녀잡지들이 재간하거나 새로운 잡지들이 창간했다. 또한 한국의 대본소 만화에 해당하는 저렴한 아카혼(赤本) 만화책이 대본소를 중심으로 유통되며 만화 게재 지면이 현저히 증가했다. <빙글빙글 쿠루미짱>으로 시작된 말괄량이 여주인공을 내세운 개그 소녀만화의 계보는 <안미츠 공주(あんみつ姫)> 등의 작품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녀만화에 스토리만화가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2) 데즈카 오사무와 <리본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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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본의 기사>(1953~1956), 데즈카 오사무

 

1914년 첫 공연을 올린 타카라즈카 가극단(宝塚歌劇団)은 오로지 여배우만으로 구성된 극단으로, 남자 역에 특화된 훈련을 받은 여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중성적인 매력,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배경, 장식적이고 화려한 연출과 의상, 로맨틱한 서사로 여성 관객들을 집중적으로 끌어들였다. 물론 관객들이 전부 여성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온 소년 시절의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도 있었다. 데즈카는 주로 여자 역을 맡는 배우 아와시마 치카게가 가끔 남자 역을 연기할 때의 독특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천사의 실수로 여자아이의 마음과 남자아이의 마음을 둘 다 지니게 된 왕자/공주 사파이어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판타지 소녀만화 <리본의 기사>(1953)를 소녀잡지 <소녀클럽(少女クラブ)>에 연재했다. 이 작품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우선 ‘스토리만화’라는 용어의 배경을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194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만화는 ‘개그/익살/웃음’만이 존재할 수 있는 가볍고 내용과 표현방식이 극히 제한된 매체로 받아들여졌다. 물론 일종의 스토리/이야기/내러티브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잡지나 신문의 한 구석, 혹은 많아야 4페이지 남짓한 지면에서는 애초부터 연속적이고 깊이 있는 스토리 전개를 펼쳐나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40년대 중반부터 저렴한 아카혼 만화책이 대량 유통되면서 오로지 만화만으로 이루어진 ‘만화 단행본’ 책이 등장할 수 있었고, 데즈카의 <신 보물섬(新宝島)>(1947)은 그렇게 변화한 출판환경을 최대한 이용해 소설이나 영화처럼 풍부하고 완성된 길이와 깊이의 ‘스토리 만화’로써 당시의 만화계에 큰 충격을 던졌다. 즉 ‘스토리 만화’는 ‘만화=개그’라는 의식이 일반적이던 시대에 ‘개그 만화’에 대한 대비적, 대항적 의미에서 탄생한 용어로, 대다수의 만화가 스토리 만화가 된 현 시점에서는 거의 사어(死語)가 되긴 했으나, 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개념이다. 요는 데즈카의 <리본의 기사>는 소녀만화에 최초로 스토리 만화를 도입함으로써 소녀만화 장르 자체의 폭을 넓히고, 소녀잡지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삽화의 세계”와 “역동적인 만화의 세계”를 하나로 조합했다.

<리본의 기사>는 타카라즈카의 이국적인 화려함과 장식성, 젠더적 유동성 뿐만 아니라 데즈카가 즐겨 보던 디즈니 애니메이션, 특히 <백설공주>(1937)와 <밤비>(1942)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부드러우면서 활동적인 선과 캐릭터 및 배경 묘사도 특징적이었으며, 아동용 애니메이션의 필터를 거친 아름다운 동화의 세계 속에서 젠더를 고민하고, 사랑을 고민하고,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인물들의 스토리를 그려냈다. 특히 판타지 장르를 통해 상당히 직접적으로 다루어진 ‘젠더적 실험성’은 현재까지도 소녀만화와 여성만화의 핵심적 테마 중 하나로 남아있다.

 

(3) 60~70년대 소녀만화: 여성작가들의 대두

1950년대부터 <리본의 기사>의 영향과 소녀잡지에 만화 지면이 증가함에 따라 ‘스토리 만화’ 소녀만화가 다수 출판, 연재된다. 여전히 대다수의 소녀만화는 남성 작가들에 의해 창작되었으며, 소녀만화에 스토리성을 도입한 점만 동일할 뿐 데즈카의 환상적이고 낭만적인 세계관을 계승한 작품은 드물었다. 이 시기의 소녀만화는 불행한 가정환경, 부모 자식 간의 생이별 등 소녀 주인공을 내세운 가족 만화거나 기구한 운명에 휘둘리는 소녀의 고생담을 신파적으로 그린 작품이 대다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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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트로이카>(1964~1965), 미즈노 히데코. 제정 러시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삼각관계 드라마로, <베르사이유의 장미>를 비롯한 이후의 역사 대하 로망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런 시기에 <리본의 기사>의 환상적인 낭만성을 계승하면서 그것을 기반으로 발전과 실험을 거듭해 새로운 연출과 이야기와 장르를 창작하며 소녀만화의 개척자가 된 작가가 미즈노 히데코다. 미즈노는 1956년 <소녀클럽> 지면에 발표한 <붉은 포니(赤っ毛子馬)>를 시작으로 <별의 하프(星のたてごと)>(1958), <하얀 트로이카(白いトロイカ)>(1964) 등의 작품으로 동세대와 후세대 소녀만화 독자와 창작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우라노 치카코의 <어택 넘버 1(アタックNo.1)>(1968)은 배구를 소재로 땀과 흙먼지에 뒤덮여 역동적인 액션을 펼치는 소녀들의 육체를 그려 배구 붐을 일으켰고, 니시타니 요시코는 <레몬과 버찌(レモンとサクランボ)>(1966)를 시작으로 학교를 배경으로 한 10대 소녀소년들의 고민과 연애를 그린 소위 ‘학원물’ 장르를 개척했다. 여성들이 여성을 위한 만화를 그리는 시대, 현재 널리 받아들여지는 소녀만화라는 개념에 비로소 부합하는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만화”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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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인이 있다!>(1975), 하기오 모토. SF, 서스펜스, 학원물을 결합한 작품.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의 일본은 고속성장과 세계적인 카운터컬처 움직임의 영향으로 문화계 전반이 역동적인 시기였다. 다수의 만화잡지가 창간되었고, <COM>이나 <가로(ガロ)>처럼 비상업적인 대안만화, 인디만화를 다루는 잡지들도 창간되어 만화의 발표 지면이 증가하고 다양해졌다. 이것이 소위 24년조(24年組, 쇼와 24년-즉 1949년이나 그와 가까운 연도에 태어난 작가가 많아서 이렇게 칭함. “꽃의 24년조”라고도 한다.)라고 불리는 여성 소녀만화가들의 활동할 수 있었던 토양이다. 그리하여 SF, 판타지, 서스펜스, 넌센스 개그, 그리고 후에 야오이-보이즈러브 장르를 파생시키는 소년들 사이의 동성애 등 소재와 장르에 거의 제한이 없는 다채로운 소녀만화들이 등장한다. 소련을 주 무대로 펼쳐지는 발레 만화 <아라베스크(アラベスク)>(1971), 미소년 뱀파이어의 비극적인 삶을 그린 <포의 일족(ポーの一族)>(1972), 가상인물인 남장여인 오스칼과 실존인물인 마리 앙투아네뜨를 주인공으로 프랑스 혁명이라는 파국을 향해 치닫는 18세기 프랑스 귀족사회를 묘사한 <베르사이유의 장미(ベルサイユのばら)>(1972), SF에 서스펜스와 학원물을 결합한 <11인이 있다!>(1976), 유럽의 남학교 기숙사를 배경으로 소년들의 동성애와 애증극을 그린 <바람과 나무의 시(風と木の詩)>(1976) 등 다채로운 작품들이 소녀만화의 저변을 넓히며 소녀만화의 황금시대를 장식했다. 특히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상당한 역사적 고증과 70년대의 반체제적 분위기에 부합하는 혁명이란 소재를 중점적으로 다룬 점, 그리고 소녀만화의 타카라즈카적 뿌리를 연상시키는 매력적인 남장여인 주인공으로 사회적으로도 큰 화제가 되었다. 70년대 후반에 이르면 이제 남성 작가는 극소수밖에 남지 않았으나, 소녀만화의 탐미 코드에 대한 메타적 패러디와 엽기 개그를 뒤섞은 <파타리로!(パタリロ!)>(1978)와 요요를 무기로 사용하는 여고생 형사의 활약을 그린 액션물 <스케반 형사(スケバン刑事)>(1975) 등 소녀만화의 다양화에 기여하고 독특한 족적을 남긴 작품들도 유념해야 한다.

 

(4) 장르 세분화와 파생의 80년대, 미디어믹스의 90년대~2000년대

1980년대의 소녀만화 시장은 내외부에서 새로운 도전을 받으면서 잡지와 장르가 세분화된 시기였다. 남성 독자를 중심으로 제작되는 소년잡지에도 다수의 여성 독자들에게도 어필할만한 작품이 증가하면서 소녀만화 외에 다양한 만화를 즐겨 구독하는 여성 독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포츠 장르와 연애 장르를 결합해 청춘남녀의 삼각관계를 서정적으로 그려낸 <터치(タッチ)>의 아다치 미츠루와, 소년/청년잡지에서 남녀 독자 양쪽에게 어필하는 작품을 발표해 성공하면서 여성 만화가들의 활동 영역을 소녀만화 너머로 개척한 타카하시 루미코의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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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OVE>(1980~), 코단샤

한편 70년대의 소녀만화 붐 때 지나치게 많은 잡지가 창간된 반작용 및 비극적 로맨스 중심의 트렌드에 싫증을 느낀 독자층의 이전으로 다수의 잡지가 폐간되기도 했다. 이런 환경으로 인해 소녀만화 잡지는 코어 독자를 겨냥하여 더욱 세분화되거나, 아예 소녀만화에서 파생된 새로운 장르들이 본격적으로 자체적인 시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1980년에는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제작된 레이디스 코믹(ladies’ comic) 전문잡지인 <YOU>와 <BE in LOVE>(현재 BE・LOVE)가 창간되었다. 레이디스 코믹은 성인층을 대상으로 하여 소녀만화에서 다룰 수 없는 노골적인 섹스 묘사나 불륜 등의 자극적인 소재를 다룰 수 있었으며, 이런 특성상 소녀만화 출신 작가도 많았으나 에로틱한 청년만화를 그리던 작가들도 포괄하여 소녀만화와 청년만화의 영향이 섞인 독자적인 장르로 발달했다. 반면 그로 인해 ‘레이디스 코믹’이라는 용어에 얽힌 다소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BE・LOVE>의 경우처럼 성인 여성의 관심사나 여성취향 만화를 게재하지만 성적으로 선정적인 내용에 치우친 종류의 잡지는 아니라는 점을 어필하기 위해 ‘여성 만화’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출판사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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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 >(1992~), CLAMP

 

이런 독자층 세분화의 일환으로 동인 작가, 즉 코믹마켓같은 아마추어 만화행사에서 활동하던 작가들을 중심적으로 기용한 신쇼칸의 <월간 윙스(月刊ウィングス: 2009년부터 격월간지로 변해 잡지명도 윙스ウィングス로 변경)>가 창간되었으며, 타마키 신(현재 케모노기 야세이)의 <PALM>시리즈, 코가 윤의 <지구인(アーシアン)>, CLAMP의 <성전(聖伝-RG VEDA-)> 등이 연재되었다. 1985년 창간된 카도카와의 <월간 Asuka(月刊Asuka)>에는 <꽃의 아스카조!(花のあすか組!)>가 인기리에 연재되었으며, 90년대에는 CLAMP의 < X >, 모리나가 아이의 <타로 이야기(山田太郎ものがたり)> 등의 작품이 연재되었다. 이런 새로운 경향의 잡지들에 연재된 만화의 대다수는 윗세대보다 훨씬 다채로운 매체와 장르를 접하고 자란 젊은 작가들이 중심이 된 새로운 타입의 여성향 만화들이었다. 이 작품들은 굳이 ‘소녀’나 ‘연애’에 구애되지 않으면서도 SF, 판타지, 액션, 양키물(불량청소년의 싸움과 우정을 그린 장르), 일상물, 개그 등 다양한 장르를 여성 취향으로 그려낸 점에 있어서 명백한 ‘여성향’ 만화였으며, 70년대 소녀만화잡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거나, 있더라도 전체 연재작 중 극소수에 불과했던 종류의 작품들이다. 이 새로운 경향의 ‘여성향 만화’들은 소녀만화에서 파생되었으면서 소년만화, 청년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소녀만화의 범주를 미성년자 여성독자층을 위해 제작된 만화 전반으로 넓게 잡았을 경우, 이 만화들 역시 소녀만화로 포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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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 피쉬>(1985~1994), 요시다 아키미

 

기존 소녀만화 잡지들도 이런 변화를 의식해 연애를 중심으로 다루면서도 당시에 인기 있던 판타지, SF, 초능력 등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도입한 작품들이 연재되었다. 호러 서스펜스물 <어둠의 퍼플아이(闇のパープル・アイ)>, 외계문명이라는 SF 요소와 환생이라는 종교적, 판타지적 요소를 섞은 연애물 <나의 지구를 지켜줘(ぼくの地球を守って)> 등이 80년대의 인기 소녀만화 작품이었다. 또한 유서 깊은 소녀만화잡지에 연재되면서 소녀만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깰 정도로 이색적이면서도 폭발적인 반응과 인기를 얻은 작품으로 <별책 소녀 코믹(別冊少女コミック)>에 연재된 <바나나 피쉬(BANANA FISH)>와 <하나토유메(花とゆめ)>에 연재된 <동물 의사 닥터 스쿠르(動物のお医者さん)>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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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진>(1995~), 타케쇼보

 

1991년 거품경제 붕괴로 출판계는 물론 문화계 전반에 타격이 왔으나, 소녀만화업계에는 아직 개척할 코어 독자층의 시장이 남아 있었다. 바로 야오이/보이즈러브(boys love, BL) 향유층이었다. 사실 70년대 소녀만화 황금기 때의 <바람과 나무의 시>, <토마의 심장> 이후 여성을 위한 남성 동성애물의 계보는 꾸준히 이어져왔다.

1978년에 이미 부분적으로 만화도 게재된 소설 중심 잡지 <쥬네(JUNE)>가 창간되었다. <파타리로!>가 패러디한 소녀만화의 탐미 코드 중에 핵심적인 것은 당연히 여성 취향으로 미화된 남성 동성애였고, <바나나 피쉬>는 하드한 범죄의 세계 속에서도 애쉬와 에이지의 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동인계에서는 기존 작품들을 가지고 원작에서는 전혀 연인 사이가 아닌 남성 캐릭터들을 커플로 그리는 패러디가 오랫동안 유행하고 있었고, 동인 작가들의 이런 취향은 그들이 <월간 윙스>나 <월간 Asuka>에 연재한 작품에도 강하게 드러나 있었다.

무엇보다 1989년부터 소녀만화잡지 <마가렛(マーガレット)>에 BL 애증극 <절애(絶愛)>가 연재되면서 크게 화제가 되었다. BL이 수익이 된다는 점은 명백해졌으며, 1993년 창간된 비블로스의 <매거진 BE×BOY>를 시작으로 <레이진(麗人)>, <하나오토(花音)> 등 다양한 BL 만화잡지가 창간되었다. BL은 소녀만화의 파생 장르면서 출신 작가들이 즐겨 패러디한 작품이 남성 캐릭터가 중심인 작품, 즉 소년만화나 청년만화가 주였다는 점에서 해당 원작들의 영향을 받았거나, 장르적 특성상 남성 캐릭터의 인체 묘사와 성행위 묘사 등에서 남성미를 더욱 육감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소년만화, 청년만화 작화와 연출을 많이 참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일부 BL 작가들이 소녀만화나 여성만화잡지로 진출하면서 역으로 소녀만화의 범주를 확장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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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녀전사 세일러문>(1992~1997), 타케우치 나오코

 

1990년대는 소녀만화의 미디어믹스가 더욱 활발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미디어믹스는 하나의 콘텐츠를 여러 미디어 형태로 확장해 기획, 제작해 팬 서비스와 상품판촉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이전에도 소녀만화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 타 매체로 제작된 적이 있었으나, 90년대 이후 소녀만화가 원작인 영상물이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일본뿐만 아닌 국제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다. 또한 연재 초반이나 연재 전부터 미디어믹스로 기획되고 영상물과 병행 공개되어 성공적인 기획력의 혜택을 보는 경우도 증가했다.

1990년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 방영되면서 더욱 폭발적인 인기를 얻은 <마루코는 아홉 살(ちびまる子ちゃん)>, 그리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동시에 연재/방영된 미디어믹스의 성공적인 기획 사례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美少女戦士セーラームーン)>를 예시로 들 수 있다. 특히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은 ‘싸우는 변신 미소녀’라는 신선한 소재로 남녀 전반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큰 인기를 끌어 90년대~2000년대 초반 일본 만화/애니메이션 붐을 상징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 밖에 <꽃보다 남자(花より男子)>는 애니메이션뿐만 아닌 성공적인 실사 미디어믹스의 힘으로 만화 독자층을 넘어서 대중적으로 폭 넓은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뿐만 아닌 대만, 한국, 중국에서도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로 우수한 인기 콘텐츠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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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쿠>(2004~), 요시나가 후미

 

2000년대 이후에 폭 넓은 미디어믹스에 성공한 사례로는 < NANA >와 <노다메 칸타빌레>(のだめカンタービレ)가 꼽힌다. 그 외의 인기작으로는 <너에게 닿기를 君に届け>, <오란고교 호스트부(桜蘭高校ホスト部)>, <해파리 공주(海月姫)> 등이 있으며, 근년에는 <오오쿠(大奥)>, <오늘은 회사 쉬겠습니다.(きょうは会社休みます)>, <내 이야기!!(俺物語!!)> 등의 작품이 다양한 미디어로 제작되어 화제를 모았다. 한편 소녀만화 잡지 시장은 일본 만화시장 전반의 잡지 침체에 큰 타격을 입고 있다. 특히 소녀만화 잡지가 이 점에 취약한 이유는 이전부터 소년만화 잡지에 비해 잡지 판매율이 저조하고, 연재작의 단행본 판매수에 수익을 의존하는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점차 인터넷 만화의 비율이 오르고 있으나, 현재 판매율이 높은 소녀만화는 여전히 잡지 연재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잡지매체의 부진은 유의미한 문제다. 물론 수십 년 동안 축적된 여성향 만화의 전통과 노하우, 그리고 그에 기반한 여성향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존속하는 이상, 소녀만화의 계보는 다른 플랫폼에서도 계속 전개될 것이다.

 

2. 한국의 순정만화와 여성만화
‘순정(純情)’의 사전적 의미는 순수한 감정이나 애정을 의미하고, 따라서 순정만화는 순수한 연애를 그리는 소녀향 만화라는 편견이 존재하기도 했으나, 80~90년대 한국 여성향 만화시장의 확장 이후로 미성년자 여성독자를 위한 연애만화에서 여성향 만화 전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확장되었다. 한국만화 전반이 그렇듯이, 순정만화 역시 방대한 시장을 갖춘 인접국인 일본 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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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이 하고 바둑이>(1960), 권영섭

 

순정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가족만화 중에서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을 차별화하기 위한 맥락이었다. 즉, 당시에는 ‘순정’이 연애가 아닌 한국전쟁 이후의 암담한 현실에서 가정의 화목을 바라며 고생하고 희생하는 순수한 소녀들의 심정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순정만화는 1957년 한성학이 발표한 <영원한 종>으로, 한국전쟁으로 고아가 된 소녀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내용이다. 초기 순정만화를 대표하는 권영섭의 <울밑에 선 봉선이>(1960)는 폭력적인 아버지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소녀의 이야기다. 전쟁 이후의 어려운 환경 속에서 가엾은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가족만화라는 점, 남성 작가들이 그렸다는 점에서 50년대 한국 순정만화는 동시대의 일본 소녀만화와 공통점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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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별>(1964), 엄희자

1960년대부터 송순히, 장은주, 민애니, 엄희자 등 여성 작가들이 등장했다. 장은주는 동화책 삽화와 미즈노 히데코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고 밝혔는데, 실제로 이 시기부터 동시대 소녀만화의 영향이 보이는 미려하고 조형화된 그림체가 증가하기 시작한다. 서사적으로는 50년대 순정만화의 소녀의 고생담이나 부모와의 생이별 전개를 따르면서도 비극 대신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권선징악 구조나, 일상에 판타지 요소를 추가하는 차별화된 특성들이 있다.

<작은 아씨들>이 원작인 엄희자의 <네 자매>처럼 해외 소설의 번안 작품도 많았다. 하지만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설치된 자율심의위원회의 사전검열, 특정 업체의 대본소 독점 문제로 만화의 내용뿐만 아니라 페이지 수와 권 수 등 분량에서도 구체적인 제약을 받게 되면서 순정만화는 성장하는 독자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하고, 70년대 중반부터는 대본소에서도 순정만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종의 순정만화 ‘공백기’가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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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 캔디>(1975) 미즈키 쿄코, 이가라시 유미코

 

한국의 순정만화와 대조적으로 1970년대 일본 소녀만화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고, 이 중 일부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당시의 일본문화 수입 금지 정책에도 몇 가지 예외는 있었는데, 한국 회사가 일본에 하청을 받아 제작된 애니메이션의 경우 ‘합작’으로 간주해서 TV에서 방영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1977년 MBC에서 방영된 <캔디 캔디>였으며 폭발적인 인기를 누려 원작 만화가 불법 복제 해적판으로 소개되었다. <캔디 캔디>의 인기로 여성향 만화의 수익성을 깨달은 해적판 출판사들은 이어서 <베르사이유의 장미> <유리의 성>, <파라오의 무덤>, <안젤리크>, <유리가면>, <악마의 신부> 등 다수의 일본 소녀만화를 출판했고, 이런 작품들의 다수는 비록 사전검열을 받기 위해(복사본이 아닌 “원고”가 필요했으므로) 한국 작가가 베껴서 그린 복제만화였지만 출중한 원작의 힘으로 독자들과 작가들을 크게 자극했다. 소녀만화 그림체와 패션 정도만 참고한 60년대 순정만화들과는 달리 70년대 후반 및 80년대의 불법복제 순정만화는 황금기 소녀만화의 연출과 컷 구조까지 거의 그대로 베껴서 소개하다 보니 더욱 신선한 충격을 던졌고, 새로운 시대의 순정만화의 양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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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무>(1987~1991), 김혜린

1980년대는 전두환 정권의 3S정책으로 출판에 대한 규제와 검열이 70년대에 비해 느슨해졌고, 대본소 독점체제를 유지하던 합동출판사도 자체적 문제와 경쟁업체들의 도전으로 몰락하였으며, 1982년 <보물섬> 창간을 필두로 여러 만화 전문잡지가 창간되면서 만화계가 활성화될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순정만화계에서는 황미나, 김진, 신일숙, 김혜린, 강경옥 등 대본소를 통해 데뷔한 80년대 순정만화 작가들이 7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 다수 유입된 일본 소녀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그 토대 위에 자신의 창작력을 펼쳤다. <북해의 별>, <비천무>, <테르미도르>, <아르미안의 네 딸들>, , <별빛속에> 등 우주의 운명, 역사, 혁명과 그 안에 휩쓸리면서 투쟁하는 개인의 모습을 그린 대서사시들은 순정만화는 순수한 연애물이나 소녀가장의 신파극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며 “순정만화”라는 장르를 더욱 확장시키고 성장시켰다.

80년대 순정만화의 의의는 아동 독자를 위해 제작된 50~60년대 순정만화들과는 달리 10대 및 성인 여성 독자층까지 포괄하기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장르 자체의 성장과 다양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또한 1985년 김혜린, 황미나, 서정희, 김진, 황선나, 이정애, 유승희, 신일숙, 이명신 이상 9명의 작가가 대본소를 통해서 출판되기 어려울 것이라 판단한 작품들을 모아 발표한 비매품 만화동인지 <아홉번째 신화>는 예상 밖의 인기를 얻으며 순정만화 잡지 시대의 초장을 열었다. <아홉번째 신화>의 인기는 대여가 아닌 소장용 구매를 원하는 독자층과, 순정만화만으로 이루어진 잡지에 대한 그들의 수요를 명백히 증명했고, 이는 1989년 <르네상스>의 창간으로 이어졌다. <르네상스>에 이어 같은 해에 <하이센스>와 <로망스>가 창간되었고, 1991년에는 육영재단의 격주간 순정만화잡지 <댕기>가, 1993년에는 도서출판 대원의 <터치>와 서울문화사의 <윙크>가 창간되는 등 순정만화 발표 지면이 대폭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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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1993~), 서울문화사

 

90년대는 한국 만화시장의 양적, 질적 팽창으로 ‘한국만화의 황금기/르네상스’로 불리지만, 동시에 90년대 후반에는 복합적인 요인으로 인해 90년대 초, 중반 만화업계의 ‘거품’이 꺼지며 시장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었던 역동적인 시기이기도 했다. 순정만화 역시 이 시기의 혜택과 피해를 입었다. 출판사들은 여러 종류의 잡지로 연령별, 취향별 세분화를 시도했고, 그로 인해 <화이트>(1995), <이슈>(1996), <나인>(1997), <파티>(1997), <케이크>(1999) 등 다양한 순정만화 잡지들이 창간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만화잡지들은 90년대 후반에 폐간되었지만, 순정만화 게재 지면의 증가와 만화 제작 시스템의 변천,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의 결과로 유의미한 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빈, 박희정, 유시진, 김은희, 천계영, 이강주, 한혜연 등 90년대에 데뷔한 작가들의 특징은 대본소가 아닌 잡지로 데뷔했다는 점이다. 이 세대의 작가들은 수많은 경쟁을 뚫고 공모전에서 우승하거나 아마추어 동인 활동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아 데뷔했다. 또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과 그로 인한 딸에 대한 교육 투자의 증가 결과 작가들 대부분이 고등교육을 받았고 독자층도 고등교육을 받은 성인여성이거나 고등교육을 목표로 하는 미성년 독자들이었다. 90년대의 순정만화는 대서사시보다 개개인의 일상을 유희적으로 그리면서 페미니즘적 비판의식을 가볍게, 혹은 진지하게 표현하거나 철학적 성찰을 하기도 하고, 기존 순정만화의 장르적 구조를 패러디하고 뒤엎기도 했다. 또한 당시 한국 동인계에 유입된 BL 만화의 영향으로 순정만화에도 성소수자 캐릭터가 전면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유희적 BL 코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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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인더트랩>(2010~), 순끼

2000년대 초반 즈음에는 순정만화 잡지는 물론 다수의 만화잡지가 폐간했지만 잡지를 구독해온 독자들의 수요는 여전히 잔존해서, <오후>(2003)와 <허브>(2004) 등의 순정만화 잡지가 창간되기도 했다. 한편 대하 순정만화 <리니지>와 <바람의 나라> 세계관을 기반으로 인기 MMORPG로 제작되었고, <풀하우스>도 인기 드라마로 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밤을 걷는 선비>가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타 매체로의 진출도 활발하다. 한편 순정만화 연재 지면은 종이에서 인터넷으로 이동했다. <윙크>는 전면 웹진 플랫폼으로 이전했고 <이슈>는 아직 종이책을 출판하기는 하지만 앱 버전도 병행해 출판하고 있다.

순정만화는 웹툰 플랫폼에서 가장 급격히 증가하는 장르면서 가장 세분화되어 분류, 정리된 장르이기도 하다. 그리고 웹툰 플랫폼의 순정만화는 기존 인기작을 리메이크해서 연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순끼, 박윤영, 김민정, 추혜연, 골드키위새 등 새로운 작가들의 순정만화가 발표되는 장이 되면서 종이 잡지만화에서 활동한 인기 작가들이 새롭게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영역이 되었다. 일본 소녀만화의 상황에 비하면 한국 순정만화는 디지털 플랫폼으로의 이전이 더 활발하고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3. 미국의 로맨스 만화와 <세일러 문> 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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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텔 헤이즈의 플래퍼 만화, 1925

 

미국은 일본이나 한국에 비해 훨씬 일찍 여성인권 신장운동이 일어났고 상대적으로 여성의 사회활동, 경제활동도 더욱 활발했다. 여성 작가의 대중매체 집필 활동 역사도 더 오래된 배경이 있어, 20세기 초반부터 여성 만화가들이 신문만화를 중심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현재까지 인기 캐릭터 상품으로 남아 있는 로즈 오닐의 <큐피(the Kewpies)>(1909) 시리즈, 아르데코 그림체로 1920년대 도시생활을 풍자한 에텔 헤이즈의 1컷 ‘플래퍼(1920년대의 자유분방하고 세련된 ‘신여성’)‘ 만화들, 개구쟁이 소녀가 주인공인 마죠리 헨더슨 부엘의 <리틀 룰루>(1935) 시리즈가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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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 로맨스(Young Romance)> (1947), 프라이즈 코믹스

1940년대는 슈퍼히어로 만화를 보고 자란 독자들이 아동용 히어로 만화에 식상함을 느끼면서 청소년, 성인 취향의 만화가 증가했다. 10대 청소년 독자를 위해 동년배 청소년들의 일상을 유머러스하게 그린 ‘청소년 유머만화(teen humor comics)’ 장르가 인기를 끌었고, 그 중에서 현재까지 출간중인 장수 시리즈 <아치(Archie)>가 태어나기도 했다. 어린 소년 독자를 겨냥해 남자 영웅이 중심인 권선징악 액션물이 주를 이룬 슈퍼히어로 만화와는 달리, 청소년 유머만화는 청소년들의 우정, 연애, 삼각관계도 다루어서 10대 남녀 독자 전반에게 인기가 있었다. 40년대 후반에 성숙한 독자층을 공략하기 위해 공포, 범죄 등등 다양한 취향의 만화가 등장했는데, 이 중에는 로맨스 만화(romance comics)도 있었다.

최초의 로맨스 만화는 조 사이먼과 잭 커비가 1947년 출간한 <영 로맨스(Young Romance)>였다. 이전부터 소설, 영화 등 타 매체에서도 로맨스 장르는 여성들에게 어필하는 분야였고, 청소년 유머만화의 연애 소재에 호의적으로 반응하는 여성 독자층을 참고해 여성 만화 독자 중심의 시장을 확인한 상태에서 시도한 ‘로맨스 만화’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이에 다른 출판사들도 <소녀들의 사랑 이야기(Girls’ Love Stories)>, <사랑과 결혼의 비밀(Secrets of Love And Marriage)>, <다크 맨션의 금지된 이야기들(Forbidden Tales of Dark Mansion)> 등의 로맨스 만화를 출시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로맨스 만화는 주로 남성 작가들이 제작했고, 장편 연재작보다는 단편이 다수였으며, 청춘 로맨스나 고딕 호러 배경의 공포 로맨스도 있는가 하면, 성인용 로맨스를 표방해 요즘으로 치면 ‘막장 드라마’에 해당하는 자극적인 내용도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하지만 1954년 코믹스 코드의 설립과 사전심의의 등장으로 가부장적인 질서에 부합하는 가정적이고 소극적인 여성상이 강제되고, 성장하는 독자들의 취향을 따라잡지 못하면서 로맨스 만화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주류 만화책이 소년 독자를 위한 슈퍼히어로 장르에만 주력하거나 적어도 그렇다는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여성 독자는 일반적으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으며 여성 캐릭터는 눈요기나 트로피에 불과했기에 원더우먼 등 소녀 독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은 일부 여성 히어로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만화 매체 자체가 5~7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여성스럽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게 된 점도 로맨스 만화 독자의 감소에 기여했다. 물론 DC와 마블의 주류 코믹스에도 꾸준히 여성 독자층은 존재했고, 1993년부터 개시한 DC의 버티고(Vertigo) 레이블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클리셰에 얽매이지 않는 다양한 성인용 판타지를 선보여 여성 독자들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키기는 했으나, 전적으로 여성 독자를 타겟, 고려한 여성향 만화 시장은 거의 없다시피 했고, 편집부, 스토리 작가, 작화가도 남성이 다수였으며, 팬들도 압도적으로 남성이라 여성 팬이나 아마추어 창작자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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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맨 미스피츠>(2009), 레이나 텔게마이어, 데이브 로만, 안즈

1970년대 중반에 대부분의 주류 로맨스 만화 시리즈가 중단되면서 1980년대, 90년대에도 로맨스 만화를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대중적 여성향 만화의 부흥은 1990년대 후반에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일어난다. 한국의 70년대에 <캔디 캔디> 쇼크가 있었다면, 90년대 북미에는 <세일러 문> 쇼크가 있었다.

1995년 첫 방영시에는 시간대 문제 등으로 인한 시청률 저조로 방영이 도중에 중단되었으나, 12500명이 서명한 재방영 요청이 오를 정도로 일부 열성팬은 확보했고, 1998년 카툰 네트워크에서 재방영되면서 인기를 모으고 비디오판과 원작 만화도 정식 발매되었다. <미소녀전사 세일러 문>의 인기는 90년대 말~2000년대 초반 미국의 망가(일본 만화) 붐과 맞물려 있는데, 이 독자층의 다수가 여성독자들이라서 여성 만화 독자들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계기가 되었다. 슈퍼히어로 장르를 중심으로 발전한 주류 미국만화와는 달리 일본 주류만화는 남성과 여성, 그리고 다른 연령대와 취향을 지닌 독자를 위한 만화가 세분화되어 발달해왔고, 특히 로맨스 만화의 명맥이 끊긴 90년대~2000년대 초반에 여성들만을 위한, 여성 작가들에 의한 만화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대다수의 북미 만화독자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미국 주류 출판사들이 장기간 외면해온 여성 독자들을 일본 만화들이 응집시키고 수면 위로 끌어올린 셈이다.

페이스 에린 힉스, 뱁스 타아, 제이크 와이트, 매트 커밍스 등의 만화가들이 이 시기에 일본만화의 영향을 크게 받은 소위 ‘세일러문 세대’의 작가들이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쇼죠 비트(Shojo Beat)>라는 소녀만화 잡지가 일본 소녀만화를 소개했고, 소녀만화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이 토쿄팝 등 일본만화, 한국만화를 중심적으로 출판하는 출판사를 통해 데뷔하기도 했다. 기존의 주류 만화출판사들도 일본만화의 유행과 여성 독자층을 의식해 마블의 경우 자사를 대표하는 인기 시리즈 <엑스맨>을 전형적인 ‘소녀만화’ 스타일로 그린 <엑스맨 미스피츠> 등의 ‘망가풍’ 버전을 출간하였고, DC는 비록 1년 만에 중단하기는 했으나 2007년에 밍크스(Minx)라는 여성향 만화 레이블을 발표하기도 했다. 일본만화, 특히 소녀만화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도입한 출판사는 만화 출판사가 아닌 로맨스 출판사 할리퀸인데, 자사의 소설들을 소녀만화가들의 작화로 번안해 영어, 일본어, 불어, 중국어, 한국어 등 다국어 이북으로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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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퀸의 만화 시리즈

 

4. 소녀만화의 영향
정리하자면, 일본 소녀만화의 뿌리는 아르데코와 아르누보의 영향을 받은 소녀잡지의 삽화와 미국 카툰의 영향을 받은 소녀잡지의 유머 만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소녀만화는 50년대부터 스토리만화를 중심으로 발전해 가족 드라마 신파극, 동화풍 판타지가 주를 이루다가 60년대부터 여성 작가들이 다수를 차지하면서 청춘 연애물, 대하 역사물, 스포츠물, SF 등 장르가 다양해지고 70년대에 황금기를 맞이해 양적으로 질적으로 크게 확장했다. 소녀만화로부터 레이디스 코믹, 여성만화, 백합, 보이즈러브 등 다양한 여성향 만화 장르가 파생되었다. 소녀만화는 일본 내에서만 멈추지 않고 해외 만화계에도 큰 영향을 끼쳤는데, 그 중 인접국인 한국이 가장 일찍 일본 소녀만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 영향과 자체적인 발전과 사회적 요인들로 어쩌면 일본 다음 가는 수준의 여성향 만화 장르를 형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한국과 비슷하게 일본 만화의 영향권에 있던 대만 만화의 경우도 1990년대 초반에 <성소녀(星少女)>를 비롯한 소녀만화 잡지가 창간되어 자체적인 소녀만화 장르가 발전하고 있다. 반면 90년대 이전까지 소녀만화가 널리 소개되지 않았던 미국의 경우 로맨스 만화라는 자체적인 여성향 장르가 존재하기는 했으나 사회적인 심의 문제와 업계 내부의 선택으로 점점 도태되고 여성 독자와 작가들은 배제되어, 만화라는 매체 자체가 남성적이라는 인식이 강화되었다. 하지만 90년대 <세일러 문>으로 대표되는 일본만화, 애니메이션 붐으로 일본 소녀만화와 일부 한국 순정만화가 소개되어 만화가 남성적 매체라는 인식에 큰 충격과 변화를 주었고, 새로운 세대의 독자층, 작가군, 시장이 형성하는 데에 기여했다.

‘소녀만화’는 그 범위를 정의하는 데에 있어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근본적인 정체성은 주로 여성 창작자에 의한, 여성 독자를 위한, 당시대 여성의 꿈과 사랑과 욕망을 반영하고 드러내는 ‘여성만화’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청춘남녀(혹은 남남, 녀녀)의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역사의 소용돌이를 묘사한 대하드라마일 수도 있다. 소녀만화, 순정만화의 특징으로 꼽히는 섬세한 감수성이 마냥 부드럽지만은 않고, 사회적/성적 약자 특유의 날카로운 통찰력이 번뜩일 때도 있다. 소녀만화는 지속적으로 영역을 넓히고 발전을 거듭하며 시대를 반영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확장시키며, 수많은 흥미로운 작품들로 독자들에게 오락과 해소와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여, 앞으로도 만화계의 핵심적인 축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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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누가 캔디를 모함했나> 박인하, 살림, 2000
‘마츠모토 카츠지와 카와이이의 미국적 뿌리 Matsumoto Katsuji and the American Roots of Kawaii,’ Ryan Holmberg, 2014, 4, 7
‘변함없는 망가의 대인기, 왜 우리는 망가에 대해 더 논하지 않는가? Manga Is Still Hugely Popular, So Why Don’t We Talk About It More?’ , Tom Speelman, 2015, 9, 23
<소녀만화에 대한 국제적 시각들: 소녀문화의 영향력 International Perspectives on Shojo and Shojo Manga: The Influence of Girl Culture> Routledge, 2015, 6, 8
‘소녀만화의 문화적 타화 수분 The Cultural Cross-Pollination of Shōjo Manga,’ Kathryn Hemmann, 2015, 6, 15
‘소녀만화의 정의 What Shôjo Manga Are and Are Not,’ Matt Thorn
<소녀문화 연구 Girl Culture: Studying girl culture: a readers’ guide> Claudia Mitchell, Jacqueline Reid-Walsh, Greenwood Press, 2008
‘순정만화의 대모, 엄희자를 아시나요?’ <플랫폼> 2009. 3
‘웰컴! 순정 웹툰 시대’ <디지털 만화규장각> 김경임, 2015, 10, 27
‘일본만화산업: 국제적 비교 Japan’s manga industry -An international comparison-,’ Yukari Fujimoto, 2015, 3, 19
‘일본 잡지협회 데이터: 여성만화잡지 JMPAマガジンデータ : 女性 コミック’ <日本雑誌協会>
<전후 소녀만화사 戦後少女マンガ史> 米沢嘉博, ちくま文庫, 2007
‘한국 순정만화와 일본 소녀만화의 관계 연구,’ 노수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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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신

웨스턴 온타리오 대학교 미디어/정보/테크노컬처 학부 졸업,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 졸업.
관심 분야는 만화 역사, 팬덤 문화, 보이즈러브, 게임, 영화 등.
만화 연구자로써 만화인, 만화규장각, 우리만화, 시사IN, 생각쟁이, 에이코믹스 등에 기사가 게재되었으며, 부천만화센터 연구사업에 참가한 전력이 있고, 한영/영한/일한 번역가로써도 활동중.
전직 AK 코믹스 편집자로 철도여행의 즐거움과 베어 취향을 널리 알리기 위해 [에키벤 ~철도도시락여행~]을 국내에 소개했고, BL 레이블 인디고 신설. (男色=남색=藍色 get it?)
3년간 모처에서 법률 문서 번역을 하다가 최근에 프리랜서로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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