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스타일로 완성되는 작가의 자기증명_ <디 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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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 마나베 쇼헤이의 <디 엔드>

 

<사채꾼 우시지마>를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잊을 수 없다. 황량한 겨울의 도시. 대기를 가득 채운 쓸쓸함. 그 비슷한 정서는 오래전 짐 자무시 감독의 영화 <천국보다 낯선> 이후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림체가 어쩐지 낯익었다. 사실 <사채꾼 우시지마>라는 작품은 그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제목에서 짐작되는 뻔한(?) 이야기에 별로 관심이 안 가다가 지인의 추천으로 펼쳐보게 된 것이다.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특히 어설픈 듯 보여도 이야기의 정서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는 그림체가 돋보였다. 그런데 이 그림은… 어디서 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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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기시감의 정체는 작가 마나베 쇼헤이의 작품 목록을 찾아보고서야 깨달았다.

<디 엔드>는 마나베 쇼헤이가 2002년에 단행본 전 4권으로 완결한 SF액션 스릴러이다. (한국판은 2005년) <사채꾼 우시지마>를 시작하기 2년 전에 낸 작품으로, 뿔뿔이 흩어져 살던 전직 특수부대원들이 다시 모여서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는 체제에 대항한다는 스토리이다. 이 과정에 범죄 조직도 개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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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정은 비교적 흔한 편이지만 <디 엔드>는 작가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하드코어-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잘 버무려져 상당히 괜찮은 시너지를 생산한다…라는 감상은 사실 처음에 봤을 때는 나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디 엔드>의 첫인상은 SF공모전에서 늘 접하기 마련인, 의욕 과잉에 어설픈 스토리 연출, 허술한 디테일 등이 겹친 응모작 같은 느낌이었다. 결정적으로 그림체가 아쉬웠다. 뭐라고 꼭 집어 말하긴 힘든데 마치 그리다 만 것 같은,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데생한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선에 힘도 없어 보였다. (돌이켜보면 그림에 대한 첫인상이 스토리나 연출 등에 대한 느낌에도 부정적 후광효과를 끼쳤던 것 같다.)

하지만 <디 엔드>는 시간이 지날수록 잊히지 않고 자꾸 떠올랐다. 강렬한 하드코어와 캐릭터들의 섬세한 내면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그림. 생각할수록 ‘전체는 부분들의 집합 그 이상이다’라는 게슈탈트 이론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었다. 결국 <디 엔드>를 재독하기에 이르렀고, ‘사실 이 작품은 썩 괜찮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작가는 자신의 테마들을 각 부품별로 그러모은 뒤, 접착제로 가장 마침맞은 그림체를 선택한 것 아닌가. 결정적으로 <사채꾼 우시지마>가 비로소 전체를 볼 수 있게 해준 촉매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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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채꾼 우시지마>를 보면 엄청난 취재 노력과 스토리텔링 능력도 짐작되지만 그림체야말로 이런 작품에 최적화된 스타일로 보인다. 아마 선에 조금만 힘이 들어갔어도 황량한 겨울의 느낌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강렬한 터치로 묘사하는 후끈한 초열지옥의 정서도 괴롭긴 마찬가지지만 ‘단말마’ 즉, 곧 끝나는 종말에 가깝다면, 마나베 쇼헤이의 그림 스타일은 영원히 끝나지 않는 얼음 지옥을 연상케 한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악몽일까?

마나베 쇼헤이가 SF장르에 익숙한지 아니면 하나의 시도였는지는 잘 모른다. 아무튼 <디 엔드>는 SF로서 크게 주목할 만한 걸작의 반열은 아니다. 그러나 스토리나 설정, 연출 못지않게 그림 스타일도 그 자체로 매우 강렬한 작가의 자기증명 방법이라는 점을 잘 보여주는 아트워크임은 분명하다. 이미 11년째 장기연재 중인 <사채꾼 우시지마>는 작가의 대표작이 되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그가 새로운 SF를 선보인다면 기대에 차서 열심히 프레임을 훑게 될 것이다.

외계의 지적 존재가 지구에 와서 호모 사피엔스의 인류학적 데이터를 수집할 때, 마나베 쇼헤이라는 샘플을 무시할 수 있을까? 이 작가가 그려 보인 그 황량한 인간의 내면 풍경들, ‘시시한 인간들의 시시한 이야기들’을 ‘시시해 보이는’ 그림으로 표현한 그 독특한 미학을 인식할까?

아무래도 좋다. 그 황량함은 이미 우리들 스스로가 사무치게 겪고 있는 실체이니. 다른 존재에게 호소하기엔 우리들의 원죄가 너무 크다. 마나베 쇼헤이는 그 씁쓸한 결론을 너무나 잘 표현하는 작가이다.

 

 

다음편

마사야 호카조노의 <루카가 있었던 여름>
엔도 히로키의 <에덴>
카시와기 하루코의 <지평선에서 댄스>
마사야 토쿠히로의 <쇼와 불로불사전설 뱀파이어>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니헤이 츠토무의 <아바라>
사무라 히로아키의 <할시온 런치>
콘 사토시의 <세라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예전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창간 편집장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SF전문가 코스프레로 살아가는 오덕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본 SF만화의 꽤 열렬한 팬이며 그런 배경을 믿고 [critic M]의 편집위원단에 겁 없이 끼어들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SF만화를 마구 권한 결과 순정만화를 보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다. 가급적 오래 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SF스러워지나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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