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지재라고 쓰고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고 읽는 비애_ 김달의 <여자 제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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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장대한 영웅담에서 여자의 위치는 남자의 그것보다 매우 미비한 경향이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서 카산드라보다 헬레네가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남자 영웅들은 말할 것도 없는 게 사실이다. <삼국지>도 비슷한 모양이다. 무예를 익힌 손상향보다 중국 역사에 손꼽히는 미녀 초선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처럼 말이다.

 

여자, 그러나 여자로만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
김달의 <여자 제갈량>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삼국지에 발상의 전환을 가미한 만화이다. 위, 촉, 오의 조조, 유비, 손권의 책사들이 여자라는 설정으로 시작된 이 만화는 왕좌지재, 즉 킹메이커의 능력을 갖췄지만 여왕은 될 수 없는 여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림1

 

어릴 적부터 제갈량은 머리는 좋지만 몸이 약해 집안에서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친모의 말처럼 “건방지고 애교도 없는 게 키만 멀대같이 커서 시집은 절대 못 갈 테니 공부라도 시켜서 입신양명이나 하게 해야지. 역사에 이름이나 남기게” 된다. 비록 마지막에 망할 년이란 욕도 얻어먹지만.

<여자 제갈량>의 첫 도입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들은 작가가 앞으로 군웅들의 책사로 활약하게 될 인재가 여자로 설정된 의미를 드러낸다. <여자 제갈량>의 재능 있고 똑똑한 여인들에게 입신양명의 길이 열린 것은 그 배경이 온갖 전란으로 나라가 혼란스러운 시절이기 때문이지만 당시의 여인으로 가야할 길에 적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천하를 얻기 위해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사람을 쓸 줄 아는 조조가 있는가 하면 여자는 집안을 돌봐야한다며 인재를 놓친 원소도 공존하는 춘추전국의 난세. 이처럼 단순히 성별을 바꾼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남녀가 유별한 유교정신의 시대에 맞춰 지아비와 자식을 위해 복종과 헌신해야 하는 여성의 사회적 한계를 단단히 품고 있다. 이러한 사실적 한계는 <여자 제갈량>의 책사 캐릭터들에게 좀 더 인간적인 면모를 부여한다.

 

그림2

 

부모를 여읜 제갈량뿐만 아니라 중달 사마의 또한 사연이 깊긴 마찬가지. 수경 선생의 제자로 들어간 제갈량과 함께 수학한 중달 사마의는 여덟 자매 중 둘째이지만 집안의 가장이자 친어머니한테 가주로 선택받는다. 모계집안의 냉혹한 서열문화와 가장의 명령에 순종하는 초라한 데릴사위인 아버지에게서 막중한 책임을 느끼는 중달. 이미 사마팔달이라 불리는 뛰어난 자매들 중 으뜸으로 여기는 중달은 왕좌지재라는 꼽히는 제갈량과 순욱에게 세속적 질투심을 느낀다. 그럼에도 한낱 티끌처럼 사라지는 권력의 무상함을 꿰뚫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남겨야 할 가문의 영광을 되새긴다.

 

그림3

 

 

“나는 여인이 아닙니다.”
이런 고민은 곽가와 순욱에게도 드러난다. 잠시 유비가 헌제와 조조에게 몸을 의탁하게 되자 조조는 유비를 포섭하기 위해 하후 가의 딸, 하후련과 장비를 혼인시키기로 한다. 그러나 하후련의 나이는 13살이지만 장비는 39살. 곽가는 이 혼인을 진행하는 순욱에게 ‘한 사람의 여인’으로 대답하라 다그친다. 그러나 자신은 여인이 아니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림4

그림5

 

사필귀정의 이치 따윈 통하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전란 속에서 곽가는 짧고 굵은 화끈한 삶을 꿈꾼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수많은 여자아이의 목숨으로 이어진 억울한 시대에 대한 분노의 눈물이 숨어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순욱은 무고한 희생을 막기 위해 혼란한 시대를 통일할 주군으로 조조를 점찍고 그 옆에서 과업을 도모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여자의 꼬리표를 떼려고 한다.

젊고 아름다운 외모로 훌륭한 지아비를 만나 자식을 낳고 살아야 하는 여인의 삶조차 살 수 없는 제갈량의 피할 수 없는 삶의 공허함. 시체까지 잡아먹어야 하는 전란의 시대에서 제일 먼저 희생되는 무고한 여자아이들을 목격하는 곽가의 분노. 그럼에도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할 수 있는 강한 군주가 이룩할 태평성대를 꿈꾸는 순욱의 이상. 군웅할거 시대에 뜻을 세우려는 이 책사들의 목적 뒤에는 남다른 사연이 숨어있고 그 사연은 현재 우리 여성들이 겪고 있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하기 때문에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능력이 아닌 오로지 외모와 태도로만 평가하며 힘없는 어린 여자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지금의 우리 시대를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듯하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
<여자 제갈량>을 <삼국지>를 변형한 또 하나의 만화로만 볼 수 없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삼국지>의 재미는 화려한 영웅담과 전술 전투장면에 있지만 <여자 제갈량> 또한 그런 재미를 주려고 한다. 그러나 조조가 평소에 존경하고 흠모해오던 관우를 붙잡기 위해 온갖 선물로 유혹하지만 실패한 유명한 일화를 코믹하게 연출하는 방식이다. 작가는 <여자 제갈량>에서 남자 영웅들의 멋진 활약상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책사들 간의 일화와 대화를 통해서 드러나는 인간사의 비애를 부각시키고 있다.

<여자 제갈량>으로 <삼국지>가 가진 모든 재미와 가치를 얻기에는 부족하다. 작가도 그 점을 원하는 바는 아닐 듯하다. 다만 책사라 불리며 세상을 호령하는 군왕과 영웅 뒤에서 활약하는 역할을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독특한 시선은 주목할 만하다.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라는 말이 결코 칭찬이나 자랑이 아닌 서글픈 비애가 느껴진다면 <여자 제갈량>을 보는 재미가 하나 더 늘어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