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마니아를 위한 어떤 진수성찬_ <루카와 있었던 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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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마사야 호카조노의 <루카와 있었던 여름>

 

<터미네이터>의 설정을 살짝 바꿔보자. 무시무시한 살인 로봇 대신에 10대 소녀가 온다. 암울한 미래의 역사를 바꾸려고 현재로 타임슬립 했다는 목적은 마찬가지다. 일당백의 엄청난 전투력으로 방해하는 자들을 거침없이 물리치는 것도.

이 소녀는 몸은 미래에 두고 ‘인격정보’만 왔다. 남주인공의 여동생 몸에 빙의한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어른스러워지고 눈빛이 그윽해진 여동생이 당혹스럽다. 그런데 사실 이 시간여행자의 정체가 모호하다. 암울한 미래를 막으려고 왔다는데 다른 시간여행자의 말을 들어보니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수상하다. 그런데 사실 이 시간여행자들은 비밀이 너무 많다. 게다가 힘들게 과거로 날아 와서 위험한 임무를 계속하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남주인공에게 네 맘대로 하라며 다 맡겨버린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은… 이런 게 단점이다. 일반 독자들이 소화하기엔 SF로서 밀도가 좀 높은 편이다. 아마 두 번은 봐야 이야기의 전후 사정이 잘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런 단점에 비해 장점들을 훨씬 더 많이 지니고 있다. 스토리와 연출의 완성도가 높고 캐릭터도 뚜렷한 편이며 고정관념을 계속 무너뜨리는 전개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한다. 그렇다고 피로감을 느끼게 할 만큼 빡빡하진 않다. 바탕에는 흑백논리에 치우치지 않는 철학이 깔려 있어서 일독을 마치고 난 뒤에도 여운이 남는다.

무엇보다도 SF팬으로서 즐기기에 딱 좋은 텍스트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여행 액션스릴러의 훌륭한 본보기이다. 로맨스 코드가 적절히 삽입된 소년물 SF 수작을 찾는다면 주저 않고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다.

작가 마사야 호카조노는 대표작 <견신>이 잘 알려져 있다. 그 외에 <이머징>, <내 이름은 AI>, <와이즈맨> 등 국내에 소개된 그의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세계와 우주라는 큰 그림 속에서 펼쳐지는 드라마를 그린다. 판타지와 SF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제재 스타일이 돋보인다. 게다가 디테일을 보면 SF 마니아들끼리는 금방 알 수 있다. “이 작가는 SF선수군.”

 

제목 없음-2

 

그 직접적인 증거가 이 만화의 각 화 제목들이다. ‘여름으로 가는 문’, ‘인간 이상’, ‘암흑의 스캐너’, ‘사랑은 운명, 운명은 죽음’, ‘어둠의 왼손’… 모두 다 유명한 SF소설들 제목을 그대로 딴 것이다. (비슷한 예로 히로카네 켄시의 <시마>시리즈가 있다. 그 작품들은 각 화의 제목을 모두 재즈나 팝 명곡들 이름으로 쓴다.) 게다가 친절하게 권말에 원래 SF작품들을 소개하는 해설지면까지 붙여놓았다. 이것만 따로 묶어도 어지간한 SF가이드가 된다. (아쉬운 것은 일본판 기준이라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은 작품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책 뒤에 크레딧을 영화와 똑같은 형식으로 붙여놓은 점이다. 맨 위에 큼지막하게 고유 폰트로 책 제목이 나오고, 그 아래로 ‘감독’ 마사야 호카조노와 나머지 스태프들의 이름이 각자 맡은 역할의 타이틀과 함께 나열되어 있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가 끝난 다음에 올라오는 스태프 롤을 그대로 인쇄해 놓은 것 같다. 이건 무슨 의미겠는가. 작가는 이 작품이 영화화되기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는 노골적인 신호 이외에 다른 해석이 있을까?

만화 원작을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화하는 사례가 흔한 일본이기에 이 작품도 곧 영화로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작품이 완간된 지 12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소식이 없다. 원작의 설정이 좀 복잡하더라도 각색하면 충분히 대중적 인기를 끌 만한 요소들이 아주 많은데, 일본의 관련업계에선 모르지 않을 텐데 왜…? 시간여행자가 현재의 사람 몸에 빙의한다는 설정이 흔해져서 그럴까? (사실 예전부터 우리나라 영화 기획자에게 이 작품을 꼭 한번 보라고 추천하고 싶었다.)

 

루카와 있었던 여름_본문1

 

기억에 남는 흥미로운 장면 하나. 여고생과 남고생이 조용한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사실 둘은 같은 사람이다. 남주인공이 미래에서 온 자신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남주인공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미래의 역사가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고, 어느 쪽을 선택하든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둘 중에 하나를 영원히 잃게 된다는 것도 안다. 가혹한 처지이지만, 남주인공에게는 사실 인류의 운명이 걸려 있다.

개인적으로 마사야 호카조노를 좋아하는 것은 늘 넓은 시야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도 ‘루카(LUCA)’라는 이름은 사실 ‘모든 생물의 공통 조상’을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Last Universal Common Ancestor). 이런 스케일의 세계관을 작품마다 피력하느라 때로는 SF가 아닌 판타지의 영역으로 넘어가기도 하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이렇게 항상 큰 그림을 그리는 작가도 있어야지. 그런 점에서 이 작가가 아직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지 않는 현실이 참 안타깝다. 지금 바로 온라인 헌책방들을 검색해보시라. 오래전에 절판된 마사야 호카조노의 작품들이 버스 기본요금도 안 되는 가격에 널려 있다. 이런 대접을 받을 작가가 결코 아니다.

 

예고 : ‘일본 SF만화 다이어리’에서 앞으로 얘기할 작품들

엔도 히로키의 <에덴>
카시와기 하루코의 <지평선에서 댄스>
마사야 토쿠히로의 <쇼와 불로불사전설 뱀파이어>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니헤이 츠토무의 <아바라>
사무라 히로아키의 <할시온 런치>
콘 사토시의 <세라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예전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창간 편집장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SF전문가 코스프레로 살아가는 오덕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본 SF만화의 꽤 열렬한 팬이며 그런 배경을 믿고 [critic M]의 편집위원단에 겁 없이 끼어들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SF만화를 마구 권한 결과 순정만화를 보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다. 가급적 오래 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SF스러워지나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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