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적 상상력의 한 정점_ 엔도 히로키의 <에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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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엔도 히로키의 <에덴>

 

사실 이 짧은 글을 쓰느라 꽤나 고심했다. 너무나 할 얘기가 많기 때문이다. 거두절미하고 말하자면, <에덴>은 정말 여러 가지 면에서 교과서로 삼아도 손색이 없는 걸작이다. 하드보일드, 액션 스릴러, 하드고어, 캐릭터, 사이버펑크, 세계관과 배경 설정, 스토리텔링, 성장담, 그리고 SF적 상상력까지 모든 면에서 가히 장인의 솜씨를 보여준다.

전 18권으로 완결된 제법 긴 작품인 <에덴>은 10권 째를 기준으로 전반부는 하드보일드 테크노 액션 스릴러의 진수이고, 후반부는 SF적 상상력의 백미이다. 그러나 이건 전체적으로 두드러진 키워드를 꼽자면 그렇다는 말이고, 사실은 작품 전체에 걸쳐 위에 나열한 장점들이 고르게 배어 있다.

이 작품에 대해 조목조목 구구절절 찬사를 늘어놓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지만, 지면 관계상 SF적 상상력 한 가지만 얘기하고자 한다. (다른 부분은 이렇게만 말하겠다. 장르에 상관없이 스토리 작가 지망생이라면 이 작품은 필독서로 꼽기에 손색이 없다. SF 팬이라면? 반드시 이 작품을 보길 바란다.)

많은 사람들이 SF를 과학 계몽 수단으로 오해하곤 한다. 물론 SF를 통해서 과학 지식과 그를 통한 과학적 상상력의 영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과학적 상상력이 선사하는 경이감(sense of wonder)을 누리는 것이 이 장르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다른 시간, 다른 공간에 대해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를 통해 시야를 넓혀 결국은 기존 세계관의 전복이나 가치관의 역전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SF 수용미학의 한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에덴>은 썩 훌륭하게 그런 경험을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에덴 = Eden: It’s an Endless World!
<에덴>은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인류가 절멸의 위기를 겪은 뒤, 국제정세가 격변한 근미래가 배경이다. 한동안 잠잠하던 바이러스가 다시 창궐하면서 이전과는 다른 양상이 나타난다. 인간이 마치 크리스털 결정처럼 변하면서 주변 사물까지 같은 모양으로 확산되고, 이윽고 지하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수수께끼 물질의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빈곤 등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 자살 대신 이 물질에 흡수되는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런 추세가 마치 종교처럼 널리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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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미래, 수수께끼의 물질에 잠식되어버린 세계

놀라운 것은 세계를 뒤덮은 이 물질에 흡수되면 인간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성질을 벗어나 거대한 집단 의식체의 한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직 인간으로 남아 있는 옛 가족이나 친구들을 담담하게 설득한다. “이제 그만 우리에게 합류하라”고. 이 상황을 타파하고자 과학자와 군인의 특공대도 나서고 심지어 원자폭탄까지 사용되지만,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불가사의한 현상들만 겪을 뿐, 변하는 것은 없다.

한편 그 즈음 지구로 정체불명의 에너지체가 접근하는 것이 포착된다. 처음엔 소형 블랙홀이라고 생각했지만, 정밀조사 결과 그것은 암흑에너지가 관측 가능한 수준으로 변화된 것이라고 판단되었다. 또한 몇 년 전부터 우주의 팽창 속도가 감소되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는데, 이런 일련의 상황들이 서로 연관이 있지 않은가 하는 가설이 제기된다.

지구를 뒤덮은 수수께끼의 물질은 거대한 탑 같은 것을 우주를 향해 세우고, 사람들은 점점 그 물질 안으로 속속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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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사실 이 작품은 현대우주론에 대한 기본적인 교양 지식을 어느 정도 알고 봐야 더 재미있다. 그래도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 덕분에 블랙홀이나 웜홀, 빅뱅이론, 상대성이론 등등의 개념이 많이 알려진 편이 아닌가? 아무튼 <에덴>은 새로운 우주의 탄생과 그 우주에 깃들 새로운 생명(정확히 말하자면 지적인 의식체의 정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 어떤 작품에 못지않은 강렬한 캐릭터들, 19금 딱지가 붙은 하드고어+하드보일드 스타일, 그리고 주인공이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가혹한 여정들…. 이 모든 요소들이 탄탄한 연출과 스토리로 엮어져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장대한 우주생명론 서사와 만나 토해내는 강렬한 시너지는 흔하게 접할 수 없는 것이다. SF소설 중에서도 이 정도의 여운을 남기는 작품은 드문 편이다.

작가 엔도 히로키에게 가장 섭섭한 것은 <에덴> 다음 작품이 SF가 아니라는 점이다. 1997년에 시작하여 장장 11년간 <에덴>을 연재한 뒤, 지금은 2008년부터 시작한 <올 라운더 메구루>라는 격투기 만화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에덴>에서 격투 장면만 떼어 놓아도 웬만한 액션 영화 뺨 칠 정도로 엔도 히로키는 격투기 전문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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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작품을 볼 때마다 일본 만화의 탄탄한 SF장르 기반에 대해 부럽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과학적 상상력은 기본적으로 교양과학이라는 기본기 위에서 자라난다. 생명공학이나 IT 등 그때그때의 유행 같은 몰입이 아니라, 진중하고 꾸준하게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 가는 자세가 바람직하다. 요즘 교양과학 도서를 읽는 독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머잖아 우리나라에서도 <에덴>같은 멋진 SF만화가 나올 수 있을까?

 

예고 : ‘일본 SF만화 다이어리’에서 앞으로 얘기할 작품들

카시와기 하루코의 <지평선에서 댄스>
마사야 토쿠히로의 <쇼와 불로불사전설 뱀파이어>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니헤이 츠토무의 <아바라>
사무라 히로아키의 <할시온 런치>
콘 사토시의 <세라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예전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창간 편집장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SF전문가 코스프레로 살아가는 오덕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본 SF만화의 꽤 열렬한 팬이며 그런 배경을 믿고 [critic M]의 편집위원단에 겁 없이 끼어들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SF만화를 마구 권한 결과 순정만화를 보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다. 가급적 오래 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SF스러워지나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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