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지역은 대표적인 국제 분쟁 지역이다. 이곳에서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보여준 일련의 모습─국제적 권고를 무시하는 독선적 태도, 팔레스타인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은 ‘가해자’ 이스라엘 대 ‘피해자’ 팔레스타인의 구도를 선명히 보여준다. 지금 소개할 <굿모닝 예루살렘> 역시 이러한 대립 구도를 공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작품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달리 감정이 격양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분노의 감정에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 작가는 이 지역에 잠시 머물고 있는 제 3자라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한 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를 보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노력한다. 폭압과 평범한 일상이 공존하는 예루살렘의 다양한 층위. 우리는 이를 통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문제에 보다 심층적으로 다가설 수 있게 된다.

p115

p101

p280

팔레스타인의 고통은 단순히 격리된 것에 머물지 않는다. 유대인은 불법으로 팔레스타인 영토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아랍인은 다시 줄어든 나머지 영토로 격리된다. 이때 유대인은 정착촌을 건설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공동체를 파괴하며, 이스라엘 정부 또한 자국민들을 막기보다,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한다. 격리와 추방의 반복. 그리고 점점 사라지는 공동체. 서부 개척 시대 백인들이 원주민들에게 가했던 방식처럼, 현재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영토를 탈취하고 아랍인을 추방한다. 역사의 비극은 이렇게 반복된다.

 

근본주의와 극단주의가 지배하는 사회
이스라엘은 과연 팔레스타인에 대해 적대적이고 배타적인 사람들로만 가득한 국가인가? 전쟁기간에 비록 통제되기는 하지만, 작가가 놀랄 만큼 자국에 비판적인 이스라엘 언론이 존재한다. 정착민의 극단적 행위를 비판하는 정치인 역시 존재한다. 또한 군 복무 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조직한 ‘Breaking the silence’라는 내부 고발 단체도 존재한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도 자국을 변화시키려는 유대인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활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온건하며 양심적인 유대들은 이스라엘 주류가 아니다. 아니, 설사 그들이 다수를 차지할지라도, 현재 이스라엘 주류 세력은 근본주의자와 극단주의자이며, 이들은 세속화되지 않은 종교를 기반으로 이스라엘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p235
<굿모닝 예루살렘>에서 그려진 ‘안식일’을 통해, 세속화되지 못한 이스라엘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자. 안식일은 모든 일을 쉬고 신에게 예배하는 날로 유대교에서 철저히 지키는 종교 의식이다. 예루살렘 도로는 그래서 타 종교인의 활동과 상관없이 안식일에 봉쇄된다. 우리에게 다소 낯선 이 같은 행위를 문화적 상대성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안식일에 공원을 개방하려는 시의 정책에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 극정통파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면, 안식일이 단순한 종교 의식이 아님을 알게 된다. 유대인에게 안식일 즉 종교는 누구도 예외 없이 따라야 할 규율이며, 이스라엘 사회를 지배하는 규범이다.

p95

극정통파 유대인 마을 사례 또한 세속화되지 못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곳은 아랍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접근하면 안 될 정도로 배타적인 공간이다. 마을 입구에는 “이방인은 오지 말라.”는 문구가 붙어 있으며, 만약 누군가 실수로 들어올 경우 유대인이 떼를 지어 그들을 위협한다. 한편으로 그들의 생활 방식 역시 굉장히 보수적이고 여성 억압적인데, “가정에서는 평균 7명 아이를 양육하며, 여성 유대인들은 삭발하고, 외출할 때는 가발이나 수건을 착용한다.”

 

예루살렘은 어디에나 있다
<굿모닝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잔학성과 팔레스타인의 비참함을 고발하는 만화다. 하지만 이 작품의 논의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종교 근본주의가 득세하고, 개인 자유가 제한되고, 여성 인권이 억압받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그렇다, 바로 이슬람 사회의 모습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그들은 서로 증오하지만, 근본주의 토대가 되는 세속화되지 않은 사회를 동일하게 공유하고 있다. 즉 <굿모닝 예루살렘>은 다음과 같은 문제의식을 포함한다. 세속화되지 않은 사회가 어떻게 그 사회 구성원을 억압하는지를, 그리고 근본주의, 극단주의가 어떻게 증오를 재생산하는지를….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국 극단주의자들의 상호의존성은 <굿모닝 예루살렘>의 다음과 같은 대사에서 잘 드러난다.

‘가자지구에 이스라엘 정착촌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는 동안, 집권당이었던 파타당은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는다며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었죠. 이제 질려버린 가자인들은 하마스에 표를 던집니다. 하지만, 그게 가자지구 사람들에게 독이 되어버렸죠. 이스라엘과 미국은 하마스를 과격한 노선 때문에 테러리스트라 규정했죠. 그리고 가자지구를 봉쇄해 버렸습니다. 가자지구 사람에게는 민주적으로 투표할 권리가 있었지만, 결국 이스라엘이 짠 각본대로 민주적으로 당하게 됐죠’.

근본주의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를 억압한다. 이 과정에서 온건하고 합리적인 집단은 배제되며, 공동체는 근본주의, 극단주의자의 이익의 장이 된다. 사실 근본주의, 극단주의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유럽의 극우 정치세력, 중동의 종교 근본주의세력 역시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우리 또한 지나간 과거와 진행 중인 현재에서 극단주의자의 그림자는 항상 어른거린다. 예루살렘은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근본주의, 극단주의자들에게 공동체의 운명을 내주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이것이 <굿모닝 예루살렘>의 진정한 주제일지 모른다.

p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