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플래쉬_그래픽노블

 

들어가며…

‘그래픽노블’은 불투명한 용어다. 사전 정의를 보자. 미국, 유럽 작가가 작업한, 문학, 예술적 성향을 표현한 작가주의(인디) 만화(1). 이 한 줄의 정의에서조차 여러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 그래픽노블이 미국, 유럽 만화를 지칭한다고 하지만, 일본, 한국 만화도 포함되는 경우가 있다. 작가주의(인디)만화라고 하지만 이 용어가 대중적으로 사용하게 된 계기는 1980년대 슈퍼히어로물인 <왓치맨>과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의 성공이다. ‘그래픽노블’은 차라리 모든 만화를 지칭하는 용어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래픽노블 작가 앨런무어는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그래픽노블은 마케팅 용어다. 나는 이 용어에 단 한 번도 공감한 적이 없다. 그래픽노블은 단지 비싼 만화책을 뜻할 뿐이다.”

그렇다. 그래픽노블과 만화 사이에 장르적 차이는 없다. 그래픽노블도 결국 만화다. 하지만 그래픽노블은 현시점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으며, 또한 독자 역시 막연하게나마 그래픽노블과 만화를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김한민 작가가 언급한 그래픽노블 정의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그래픽노블은 만화다. 단 조금 다른 만화다. 하지만 그 작은 차이는 굉장히 중요하다.”라고 말한다(2). ‘그래픽노블’은 일반적으로 접하는 만화와는 조금 다른 낯선 만화라는 것이다. 이 정의가 여전히 불만스러울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보다 우선 그래픽노블을 경험해보는 것이 어떨까? 어쩌면 많은 그래픽노블 작품 속에서 작지만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을 지 모른다. 이것이 <그래픽노블의 다채로운 세계 들여다보기>가 기획된 이유다. 그래픽노블 세계를 향한, 본격적인 첫걸음을 내디뎌보겠다.

 

그래픽노블의 다채로운 세계 들여다보기

바스티앙 비베스_ <내 눈 안의 너>

표지
‘1인칭 시점’은 ‘소설’에 우호적이다. 주인공 나 즉 ‘경험자아’를 자연스럽게 재현할 수 있으며, 또한 ‘내적 독백’으로 주인공의 심리와 정서를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지에 의존하는 매체의 경우 그렇지 않다. 영화를 보자. 1인칭 시점 영화의 경우 감정이입 대상인 주인공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작품에 몰입하기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의 시점 즉 ‘카메라의 눈’은 소설에 비해 인물의 심리와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어렵다. 그로 인해 인물이 바라보는 장면은 우리가 직접 본다는 느낌 대신 감정이 표백된 낯선 이미지로 나타난다(3).

1인칭 시점 재현의 어려움은 이미지로 구성된 만화 역시 예외가 아니다. 화면에 덩그러니 놓인 주인공의 시선은 당혹스럽다. 하지만 지금 소개할 <내 눈 안의 너>는 이렇게 텅 빈 공간을 섬세하게 사랑의 감정으로 채워 나간다. 바로 이 지점이 <내 눈 안의 너>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1인칭 시점의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만화의 풍부한 잠재력을 보여준다. 건조한 시선에 생기를 불어 넣고, 제한된 장면으로도 매끄럽게 서사를 끌어 나간다. 그 결과 소설과 영화와 차별되는 만화 고유의 1인칭 시점 작품이 우리 앞에 놓이게 된다.
시점
만화가 그려내는 1인칭 세계

‘영화의 시점’ 즉 카메라의 눈은 기본적으로 물질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 ‘물리적 시점’이다. 영화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는 ‘만화의 시점’은, 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주관적이며 정서적인 시점이다. 그것은 생각과 감정이 고스란히 작가의 손에 전달되어 창조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1인칭 시점은 작가의 의도에 따라 다양한 감정들을 담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내 눈 안의 너> 작가 ‘바스티앙 비베스’는, 1인칭 시점에서 독자에게 생생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최적화된 작가다. 그는 뛰어난 데생 실력을 가진 작가다. 그가 그려낸 선들은 인물의 육체를 섬세하게 타고 흘러내린다. 그리고 이렇게 유려하게 흐르는 선들은 인물의 미묘한 감정선을 정확히 포착한다.
도서관
그녀와 주인공이 도서관에서 만나는 장면을 보자. 그녀는 앉아 있다. 그리고 주인공과 단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뿐이다. 하지만 이 짧은 순간에도, 그녀는 어떠한 표정도 동일하게 반복하지 않는다. 그녀의 눈이 커진다. 그리고 입가에는 미소가 스친다. 이어 고개를 살짝 숙이다 이내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고는 다시 주인공의 눈을 바라본다. 그 표정 안에는 약간의 어색함 그리고 이어지는 설렘과 떨림이 있다.

그녀의 작은 표정 하나, 하나가 섬세하게 주인공 눈 안에 담겨 있다. 이 모습은 그녀의 감정만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주인공의 감정 또한 배어 있다. 주인공 눈에 비친 그녀는 바로 주인공의 감정이 투영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흘러내린 머릿결이 아름답다. 그녀의 붉게 상기된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세상에 그녀 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이 순간 가장 빛나는 존재다.
동물원
그녀의 모습이 낯설다. 한없이 밝아 보이던 그녀에게, 이별의 상처가 있다. 그녀와 주인공은 동물원에 간다. 동물원은 다른 무언인가를 응시하는 공간이기에, 이곳에서 그녀의 모습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다. 주인공이 바라볼 수 있는 그녀의 모습은 오직 옆모습뿐이다. 그녀는 더 이상 화사하게 빛나지 않는다. 대신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주인공의 마음은 서늘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그는 알지 못한다. 다만 한 가지, 그녀가 이제 곧 자신을 떠날 거라는 사실만을 예감한다.

 

사라진 대화와 언어 놀이

<내 눈 안의 너>의 주인공은 말이 없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무엇인가 말을 하지만 화면에서는 그것을 가시화하지 않는다. 오직 그녀의 목소리만 보여 줄 뿐이다. 독자는 그녀의 대답으로 그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유추해야 한다. 초반부 ‘비트겐슈타인’이 언급된 이유다. 그녀는 ‘언어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을 공부하다고 말한다.
식당
그녀와 주인공의 대화는 흡사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놀이’를 연상시킨다. ‘언어놀이’의 요점은 언어를 행위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표현의 의미는 다양한 언어활동의 맥락에서 그 표현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4). 이러한 관점에서 텍스트 속 인물과 텍스트 밖 우리 즉 독자는 <내 눈 안의 너>라는 공간에서 ‘언어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인공은 ‘무언가’를 계속 그녀에게 말한다. 그리고 각각의 ‘무언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동일한 형태이지만, 각 의미는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규정된다. 가령 그녀는 “내 것도 먹어 볼래?”라고 질문하고 주인공은 ‘무언가’를 말한다. 이어 그녀는 “먹어봐야 알지, 먹어 봐봐.”라고 답했을 때, 여기서 우리는 ‘무언가’는 “괜찮아. 내 취향은 아닌 것 같아.”라는 유사한 뜻으로 추측할 수 있다.

아마도 이 같은 실험은 1인칭 시점의 만화의 한계를 극복하기 시도였을 것이다. 주인공 목소리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소설과 달리, 만화에서는 그것을 담아내기에 화면의 한계가 있다. 대화도 마찬가지다. 만약 주인공의 대사가 모두 삽입된다면 <내 눈 안의 너>의 화면 구성은 깨져버릴 것이다. 누구의 것일지도 모를 말풍선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 채.

<내 눈 안의 너>는 사랑에 빠진 존재의 시선을 통해 보는 사랑 이야기다. 바라본다는 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행위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화자의 주관적인 감정까지 동반하는 행위다. 그래서 그의 눈에 비친 세상, 책으로 빽빽하게 채워진 도서관 책장 사이에서도, 나른한 오후 길거리 풍경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목을 감싸는 푸른 목도리에서도, 사랑스러운 마음이 담겨 있다. 사랑하는 이의 스쳐간 시선에는 사랑하는 이의 감정이 남겨져 있다.

기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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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화 애니메이션 사전
(2) Graphic Novel 11
(3) 나병철, 영화와 소설의 시점과 이미지
(4) 사용과 언어놀이,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00881&cid=41908&categoryId=41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