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에 해피엔딩은 없다_ 카시와기 하루코의 <지평선에서 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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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카시와기 하루코의 <지평선에서 댄스>

 

시간여행 스토리는 대개 이런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의 불행을 해결하기 위해 과거로 가서 원인을 없앤다.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지만 미래와 현재, 과거를 열심히 오가며 틈을 메우다 보면 결국엔 해피엔딩을 맞는다.’
생각해봐야 할 점은 과연 이 해피엔딩이 진짜냐 하는 것이다. <지평선에서 댄스> (전 5권)는 그 환상에서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애틋한 시간여행 이야기이다.

시간여행은 SF의 하위 장르들 중에서도 인기가 높다. 과학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일반 독자들도 별 진입장벽을 느끼지 않고 시간여행 스토리를 즐긴다. 물론 SF마니아일 필요도 없고 딱히 ‘SF’라는 장르조차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여행자의 아내>나 <어바웃 타임> 같은 영화, <나인>이나 <옥탑방 왕세자>같은 드라마도 다 시간여행 이야기로 인기가 있었지만 SF라서 유명한 건 아니었다.

이건 사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 자체가 그만큼 허술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따져 보면 모순이 많다. 결과가 원인에 종속되는 인과율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고, 시간여행의 출발과 도착지의 시공간 좌표가 늘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은 너무나 매력적이기에 SF스토리텔링에서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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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은 결국 평행우주간의 이동일 뿐

<지평선에서 댄스>는 타임머신 실험을 하다가 육체를 잃은 여성 과학자가 주인공이다. 주인공이 사망한 것으로 단정한 동료 과학자 남자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폐인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사실 주인공은 정신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시간여행 실험이 벌어질 때마다 다시 현실 세계에 나타난다. 문제는 인간이 아닌 다른 동물들의 몸에 들어간다는 것이지만. 이 작품은 한 남자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눈물겹게 분주히 시공간을 누비고 다니는 한 여성의 순애보이다.

결론적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간절하게 해피엔딩을 찾아다닌 끝에 ‘이 정도면 됐다’ 싶은 선에서 타협한다. 사실은 다른 모든 시간여행 이야기들의 실상이 그렇다. 해피엔딩이란 애초부터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간여행을 떠나는 순간, 여행자를 제외한 다른 모든 주변 현실들은 고스란히 그 상태로 남은 채 여전히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백 투 더 퓨처>는 모든 것이 해결된 해피엔딩인 것 같지만, 맨 처음 주인공이 과거로 떠날 때 남겨두고 온 원래 세상은 그대로이다. 과거를 바꾼 뒤 다시 돌아온 현재는 원래 자기가 처음에 떠났던 세상과는 다른 우주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논리적으로 모순이 너무 많아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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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에서 해피엔딩은 어렵다

<지평선에서 댄스>는 시간여행이 사실은 숱하게 많은 평행우주들 간의 수평 이동일뿐이라는 점을 작중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 해피엔딩이란 단지 그중에 한 가지 세계만을 택하는 것일 뿐, 행복하지 않은 다른 세계들이 훨씬 더 많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시간여행 이야기는 우리의 현실에 대한 하나의 강력한 은유로서 작동한다. 행복하지 않은 일상에서 행복한 부분만으로 시야를 좁혀 보게 만드는 것. 그리고 거기서 만족을 느끼게 하는 것이 시간여행에서 얻는 해피엔딩의 실체인 것이다.

 

카시와기 하루코만의 캐릭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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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캐릭터인 ‘나나’의 심리

카시와기 하루코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편은 아니지만 캐릭터 설정의 독특함으로 주목할 만한 작가이다. 인물들의 심리와 내면 묘사가 일품이다. 아마 <지평선에서 댄스>를 본 사람이라면 남녀 주인공 못지않게 ‘나나’라는 조연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일종의 사이코패스인데 그 생각과 행동이 상당히 심도 있게 묘사되어서 독자로 하여금 ‘이런 부류의 사람들 심리란 어떤 것일까’ 하고 한 번은 곱씹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작가의 모든 작품에는 이런 흥미로운 여성 캐릭터가 꼭 등장하는 것 같다. 영화로도 만들어진 <빠라빠라~빰>의 주인공 여고생 역시 음악에 몰입하면 정신을 잃다시피 하는 괴짜 캐릭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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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시와기 하루코 신작,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

현재 카시와기 하루코는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도의 생활>이라는 매우 흥미로운 제목의 작품을 연재하고 있다. 원래 이 표현은 일본 헌법 제25조에 나오는 글인데, 사회복지 공무원인 주인공이 기초수급자들을 하나씩 만나고 다니면서 접하는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 빈곤계층이나 정부 어느 한 쪽 입장에 치우치기보다는 담당 공무원의 애환과 밑바닥 인간 군상들의 가감 없는 실상을 다루어 일본에서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만큼 용기 있는 작가이자 작품이라는 평을 듣는다는데, 우리나라에도 꼭 소개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예고 : ‘일본 SF만화 다이어리’에서 앞으로 얘기할 작품들

마사야 토쿠히로의 <쇼와 불로불사전설 뱀파이어>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니헤이 츠토무의 <아바라>
사무라 히로아키의 <할시온 런치>
콘 사토시의 <세라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예전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창간 편집장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SF전문가 코스프레로 살아가는 오덕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본 SF만화의 꽤 열렬한 팬이며 그런 배경을 믿고 [critic M]의 편집위원단에 겁 없이 끼어들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SF만화를 마구 권한 결과 순정만화를 보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다. 가급적 오래 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SF스러워지나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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