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를 기르는 법>은 왜 <혼자 사는 법>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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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일상툰과의 차이: 작가 ≠ 캐릭터

독자에게 일상툰은 가볍게 즐기면서도 부담이 적다. 또한 실생활과 겹치는 부분도 많아 공감가는 구석도 상당히 많다. 보통 작가가 자기 자신을 캐릭터화 해서, 일상에서 겪었던 일을 재미있게 각색한 짧은 길이의 웹툰으로, 예능 방송에서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장르가 대두되던 때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이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일상툰은 웹툰과 함께 성장한 장르다. 지면의 제약이나 즐기는 데 드는 비용이 매우 적은 편인 웹툰의 환경과 더불어 블로그나 SNS 등 인터넷 매체를 통해 자기표현 욕구를 충족하거나, 반대로 관음 욕구를 충족하는 일이 쉬워진 것도 이유 중 하나다. 그래서인지 독자는 보통 일상툰 속의 캐릭터를 작가와 동일시한다. 작가가 자신이 겪은 일을 각색하기에,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말하는 ‘리얼’처럼 분명 각본이 존재하지만 한없이 현실과 가깝거나 적어도 현실을 반영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타인의 ‘일상’을 주전부리 집어먹듯 소비한다.

꼭 일상툰은 작가의 일상을 담아야만 할까? 그리고 공감을 유도하는 데서 멈춰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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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연의 <마조 & 새디>의 한 장면. 자신과 부인을 각각 마조와 새디라는 이름으로 캐릭터화 했고, 실제 부부에게 일어난 일상의 사건을 만화 소재로 삼았다

예능인이나 코미디언이 ‘공감개그’라 부르는 유형의 개그가 있다. 일상생활의 세밀하고 작은 ‘공감’을 끄집어내 과장하면 관객의 웃음을 끌어낼 수 있다. 웃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을 비틀 때 나온다. 일본에서는 이를 ‘아루아루 네타(あるあるネタ)’라고 부른다. ‘공감개그’는 손쉬운 반면 ‘리얼 버라이어티’처럼 주전부리 소비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굳이 나아가야 하냐,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라는 반론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국의 스탠드-업 코미디가 히피세대를 거치며, 리처드 프라이어나 조지 칼린 등이 사회의 부조리를 풍자하는 코미디 본래의 기능을 스탠드-업에 도입해 단순한 공감을 유도하는 게 아니라 사회 비판을 유도하고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도와 사회적으로도 순기능을 했던 역사가 있다. 그 덕에 스탠드업 코미디는 미국에서 수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인기 장르로 자리잡았다. 반면 우리나라의 최효종 등이 주도했던 ‘공감개그’는 여전히 소극장 쇼트-콩트 쇼 방송의 한 꼭지에만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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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논리왕 흑형’으로 불리는 유명한 스탠드업 코미디언 크리스 락의 총기 규제 관련 조크. 사회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코미디를 시도해 사회비평의 영역까지 나아간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사회 비평가의 역할을 맡고, 대중은 그들을 일종의 ‘일상의 철학자’로 여기게 되는 데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스스로를 캐릭터화 하는 일상툰과 유사한 방법론이 있다.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자신의 일상이나 경험을 이야기하며 공감을 유도한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일종의 캐릭터로 간주하고, 스스로와 분리시켜 자기 자신을 풍자한다. (실제로 그들의 ‘조크’는 직접 쓰기도 하지만 스탠드업 조크를 전문으로 쓰는 작가에게서 구입하기도 한다. 남이 쓴 ‘조크’를 자기 경험처럼 이야기하는 것이다!) 코미디언과 캐릭터가 분리되어 있는 덕분에, 코미디언은 캐릭터를 관조하는 시선으로 관객이나 사회를 관조하고 풍자하게 된다.

 

 

슈퍼 히어로(?) 이시다의 오리진 스토리

<혼자를 기르는 법>의 작가 김정연과 주인공 ‘이시다’도 (독자가 동일한 존재로 간주하고 에피소드를 작가의 것이라 간주한다 하더라도) 서로 분리되어 있다. 작가와 주인공의 분리는 이 만화가 일상툰의 틀에만 머무르지 않게 만든다. 마치 스탠드업 코미디언처럼 작가 김정연은 자신이 창조한 캐릭터 이시다를 마치 실제 존재하는 타자처럼 여기고 관찰하면서도 감정이입한다. 마찬가지로 이시다는 자기 자신을 둘러싼 외부 세계와 삶, 그리고 자기 자신도 타자로 여기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김정연과 이시다는 거리를 두고 관조하면서도 풍부한 감수성으로 외부의 세계와 타자를 느끼며 울고 웃는다. 독자는 두 존재의 태도에 영향을 받아, 단순히 공감하거나 마취 당하듯 위로받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의 일상을 한 발짝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관조하고 비판하게 된다.혼자를 기르는 법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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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에게는 미국의 슈퍼 히어로 코믹스의 오리진 스토리처럼 ‘탄생설화’가 주어진다

작가는 캐릭터를 이용해 일상을 그대로 옮기고, 독자는 이를 즐기는 식의 소비는 소설에서는 이미 소개한 바 있는 ‘시쇼세츠(私小説)’ 같은 특별한 장르만 해당한다. 대부분의 소설은 이와 정반대로,

1) 입체적인 캐릭터
2) 자립하는 캐릭터
3) 작가와 캐릭터의 분리

이 세 가지를 매우 중시한다. 근대에 이르러 소설가나 평론가는 중요한 문학적 성취 중 하나로 입체적이고 자립해, 작가와는 분리된 캐릭터를 만들려고 한다. 작가가 작품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고 거리를 둬 객관적인 눈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꼽는다.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조건은 사실 미국 만화가가 의존하는 ‘슈퍼 히어로 코믹스’ 산업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미국의 슈퍼 히어로 코믹스의 경우, 철저히 분업으로 이루어져 한 작가가 한 캐릭터를 소유하는 경우는 적고, 작화가와 캐릭터가 분리되어 있어 다양한 작가가 세대를 거쳐 가며 여러 버전으로 캐릭터를 등장시킨다. 이를 가능케 하는 이유는 ‘오리진 스토리’라는 미국 슈퍼 히어로 코믹스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다.

‘오리진 스토리’란 슈퍼 히어로가 어떻게 슈퍼히어로가 되었는지를 알려주는 탄생설화다. 설화나 신화 속 주인공이 보통 사람과는 다른 탄생설화가 있듯, 슈퍼 히어로도 비범한 사건으로 분리되어 자립한다. 슈퍼맨은 외계행성 크립톤에서 왔고, 배트맨은 부모님이 죽는 사건을 목격하며, 스파이더맨은 자기가 보고 지나친 악당이 삼촌을 죽여 죄책감에 시달린다. 이시다에게도 탄생설화가 주어진다. 자기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으로 ‘이시다’라는 이름을 받는다. (현실에서는 “밑”을 뜻하는 일본어 ‘시타(下)’에서 유래한 ‘시다’ 취급을 받지만.) 이시다는 슈퍼 히어로 만큼 거대한 사건을 갖지는 않아도,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가와 분리된다.

 

“어떻게 살면 그런 쫄깃한 말을 하지?” 독특한 언어감각과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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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를 자립한 캐릭터로 여기가 하는 데에는 독특한 언어감각도 한몫한다. 자취방 주인이 ‘범속한 취향’으로 꽃이 가득한 벽지로 도배해버리자 “매일 식물의 성기를 보면서 살게 되다니!” 하고 망연하게 웃고, 싸구려 가구 특유의 “굳이 공정을 추가하면서까지 자꾸 뭘 박은 과도한 장식”이라는 범속한 취향에는 “기꺼이 수고 들여 만든 못난 것들”이라며 더욱 망연하게 웃는다. 인류를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는 통속적인 상용구에는 “이분법 깡패!” 라는 시각화된 용어를 사용한다. 이시다는 스탠드업 코미디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언어감각으로 상황을 한 발짝 물러나 한 마디로 압축하는 메타적 방법으로 일상을 풍자한다. 독특한 언어 사용이 캐릭터를 생생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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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의 독특한 언어감각

오오하시 타카유키, 오쓰카 에이지 등 스스로가 ‘라이트노벨’ 작가면서 동시에 평론가인 작가들은 일본의 문학적 사조를 연구해 “특정한 말투가 캐릭터를 형성한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현대의 ‘나’라는 자아, 일상을 포섭하는 메타적 캐릭터는 언문일치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이는 월터 J.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시다는 “탄생설화 이후로 살아온 자기만의 삶으로 구축된 과거의 삶”을 바탕으로 일상과 세계를 메타적으로 바라본다. 독자는 독특한 언어감각을 토대로 역연산하여, 실제로는 존재할 리 없는 이시다의 과거를 존재한다고 간주한다. 이 과거는 작가의 과거와는 다른 것이기에, 이시다는 보통의 일상툰과는 다른 영역으로 나아간다. 이시다에게는 독자적인 자아가 존재한다.

 

“왠지 얼굴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에게 말을 걸게 됩니다.”

일상툰에 머무르지 않기에, 독자는 <혼자를 기르는 법>을 읽고 스스로의 일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일상은 자기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에만 매몰되는 자폐적인 자기연민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시다는 언제나 자기의 일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외부세계의 ‘타인의 일상’을 예민한 감수성으로 파악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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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일상인 ‘퇴근길 정체’를 상상하는 이시다

특히 내가 주목한 부분은 ‘주위를 둘러싸고 있을 수많은 파이프들을 상상’해 보는 장면이다. 이는 마치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과도 닮아있다. 위빠사나 명상은 자기 자신을 이루고 있지만 평소 일상에서는 의식하지 않는 수없이 많은 ‘연기(서로 의존하는 관계)’를 하나하나 의식하고 상상하며 이름을 붙이는 명상으로, 남방불교에서 주로 한다. 이 명상의 목적은 자기 자신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세계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행한다.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간단히 말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어디까지가 나인가”, 그리고 “역지사지 하기”다. 모두 타인과 공존하며 사는 살기 위해 자기 자아를 명확히 하는 과정의 일부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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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 싼 파이프의 위빠사나 명상

<혼자를 기르는 법>은 작품 자체의 구조와 이시다의 행동을 통해 독자가 자기 자신의 삶을 ‘위빠사나’하도록 유도한다. 일상툰의 ‘공감’ 만으로는 독자의 눈이 구체적인 정보로 매몰되기 쉽다. 추상도를 높이지 않으면 주전부리로 끝난다. 물론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만, 변화가 없이 새로운 일상을 발굴해 소비하는 데에 그치게 된다. 이는 장르 전체의 정체로 이어질 위험이 있다. 실제로 댓글란이나 개인 블로그의 소개글을 보면, <혼자를 기르는 법>이 재미있고 공감가면서도 어떻게 언어화하여 소개할 지가 난감하다는 (마치 모 복분자주 광고처럼) 의견이 많았다. 그 이유는 구체적인 사건이나 개그에 몰두하게 만들기 보다 독자 자신이 거리감을 유지하며 관조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나는 분석한다.혼자를 기르는 법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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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다음에 ‘월급 들어왔다’는 문자 보고 가마우지 인생 이시다는 “개불쌍한 가마우지의 삶”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불교에서는 위빠사나 명상 끝에 자비심이 생긴다고 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은 자신과 타자를 명확히 분리했을 때 비로소 생긴다. 이 작품을 권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일상을 관음하면서 이를 자기 자신에게 ‘역지사지’하고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독자를 자기반성으로 유도한다. 그래서 <혼자로 사는 법>이 아니라 <혼자를 기르는 법>이다. 이시다가 스스로 자립하기 위해 ‘기르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통해 독자가 스스로를 ‘기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손지상

소설가, 만화평론가, 칼럼니스트, 번역가.

주요 출간:
단편집 [당신의 苦를 삽니다], [데스매치로 속죄하라 - 국회의사당 학살사건], [스쿨 하프보일드], [일만킬로미터 너머 그대. 스토리 작법서 [스토리 트레이닝: 이론편], [스토리 트레이닝:실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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