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외로움을 따를 때_ 제프 르미어의 <에식스 카운티>

그래픽노블은 ‘그래픽(graphic)’과 ‘노블(novel)’의 합성어다. 만약 지금 소개할 <에식스 카운티>를 ‘그래픽’과 ‘노블’중 하나를 선택해 설명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그렇다면, ‘노블’을 선택하겠다. <에식스 카운티>의 ‘그래픽’ 즉 작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작가가 거친 펜선으로 그려낸 강렬한 흑백 화면은 작품 속 주제인 인간의 고독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하지만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책 분량에서 ‘노블’ 그것도 장편 소설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식스 카운티>는 내용적인 측면에서 장편소설과 닮아 있다. 이 작품은 여러 등장인물과 여러 사건이 얽혀, 시간과 장소를 이동하며 이야기를 구성한다(1). 게다가 긴 분량을 이용해, 에식스 카운티에 살아가는 두 집안의 가족사를 긴 호흡으로 담아내고 있다. <에식스 카운티>는 이렇게 앞선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러했듯 가족의 살아가는 이야기 즉 그들의 굴곡진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한다.

<에식스 카운티>는 ‘농장 이야기’, ‘유령 이야기’, ‘시골 간호사’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농장 이야기’와 ‘유령 이야기’에서는 이 작품의 중심축인 ‘르뵈프’ 가족사로 전개되며, ‘시골 간호사’에서는 앞의 두 이야기의 공백을 메어주는 간호사 ‘앤번’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혼자로 키워져야했던 소년

1부 ‘농장 이야기’는 소년 ‘레스터’와 그의 외삼촌 ‘케니’의 이야기다. 레스터는 ‘혼자’다. 태어날 때부터 그의 곁에는 아버지가 없다. 심지어 누구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의 어머니마저 암으로 그의 곁을 떠난다. 외삼촌 케니는 이제 고아가 된 레스터를 돌봐야 한다. 하지만 케니는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될지 알지 못한다. 그는 감정이 서툰 사람이다. 레스터 역시 새로운 가족에 적응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다. 그는 삼촌과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며, 대신 슈퍼히어로 복장을 입은 채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농장 이야기 1

황량하고 쓸쓸해, 이제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삶. 하지만 그들의 삶에 낯선 이가 등장한다. 한때 아이스하키 선수였다가 지금은 부상 때문에 은퇴한 ‘지미’라는 남자다. 레스터는 이상하게도 그가 편안하고 낯설지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외삼촌 케니는 그가 거슬리고 불편하다. 극명하게 갈리는 두 사람의 감정. 지미와 케니의 말다툼 도중, 그 이유가 밝혀진다. 지미는 오래전 레스터 어머니와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그는 아이스하키 선수가 되기 위해 그녀를 두고 에식스 카운티를 떠난다. ‘지미’는, ‘레스터’의 아버지다.

유령 이야기 2_3

 

순간의 실수, 유령이 되어버린 남자

2부 ‘유령 이야기’의 첫 장을 넘겨보자. ‘농장 이야기’의 인물들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쓸쓸하게 의자 않아 허공을 응시하는 노인 ‘루’의 모습만이 잡혀 있다. 루는 과거를 더듬는데 하루의 대부분을 흘려보낸다. 그의 기억 속에는 젊은 시절 하키 선수였던 자신과 동생 ‘빈스’가 있다. 고향 에식스 카운티를 막 떠나 대도시 토론토에서 촉망받는 하키 선수로 주목받을 때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두 형제의 관계는 곧 파국을 맞게 된다. ‘루’가 동생 ‘빈스’의 여자친구 ‘베스’와 충동적으로 하룻밤을 보낸 것이다. 몇 달 후, 빈스와 베스는 고향 에식스 카운티로 돌아가, 루의 자식일 수 있는 딸 ‘메리’를 낳는다. 그러고는 루와 빈스 두 형제는 노인이 될 때까지 연락을 끊고 산다. 루는 철저히 ‘혼자’가 된다.

루의 잘못에 대한 처벌이 이 정도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운명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고, 루의 몇 줌 안 되던 관계마저 앗아가 버린다. 이 거대한 힘은 교통사고로 ‘빈스’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살아남은 이들마저 곧 루의 곁을 떠나게 만든다. 결국 이야기의 마지막 여정에 루에게 남겨진 유일한 혈육은, 빈스의 딸이면서 동시에 루의 딸이기도 한 ‘메리’의 아들뿐이다. 그 아이는 뭉툭한 코와 단단한 턱을 가졌다. 어디선가 익숙한 모습이다. 그렇다. 그는 바로 사랑하는 이를 보내고, 자신의 아들조차 먼발치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지미’였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퍼즐이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으로 펼쳐진다. 르뵈프가의 ’루‘로부터 시작되는 고독한 삶은 손자 ’지미‘를 거쳐, 증손자 ’레스터‘로까지 이어진다. 각 인물의 외로움은 그렇게 차곡차곡 포개어지며 커다란 울림을 준다. 거듭되는 가족의 비극을 바라보며, 우리는 외로움이 온전히 그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외로움은 작품 속 인물들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안고 가야 할 본연의 감정과 맞닿아 있다.

유령 이야기 5유령 이야기 6

<에식스 카운티>의 인물들은 그리스 비극의 무대 주인공이다. 그들의 고독한 운명은 비극처럼 어떤 악행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을법한 ‘인간적 흠결’에서 연유하기 때문이다(2). ‘루’와 ‘지미’는 한 순간의 선택으로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그 대가로 가족과 단절된다. 게다가 운명은 가혹해서 사랑하는 이들을 죽음으로 앗아버리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용서의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3부에 거대한 눈보라 속에 놓인 수녀와 아이들처럼, 루와 지미 역시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 앞에 놓인 왜소한 개인이다. 우리는 그들을 연민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시 그들처럼 실수하고 때때로 타인에게 상처 주는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한계 지어진 생의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 에식스 카운티의 사람들의 외로움은 개인을 넘어, 인간의 존재론적 외로움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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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현대문학대사전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33733&cid=41708&categoryId=41737
(2) 최영진, 비극적 세계관과 아테네 민주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