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 ‘아캄’에 초대 합니다_ <배트맨: 아캄 어사일럼>

배트맨은 ‘그래픽노블’ 용어를 대중화하는데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1). 그래픽노블을 작가주의 만화로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사실이 낯설 수 있다. 소년 대상의 액션 만화가 어떻게 성인취향의 예술만화가 될 수 있냐는 것이다. 특히 출판사가 작품 방향을 설정하고, 이에 따라 작가, 만화가를 배치하는 슈퍼히어로 만화 특성상 예술성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 보인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슈퍼히어로 만화가 한편으로 그 시스템 내에서 변이를 발생시키고, 새로운 예술적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점이다.

가령 긴 역사 속에 부침이 있긴 했지만, <배트맨> 또한 이 같은 성취를 이뤄냈다. 초창기 배트맨은 만화의 황금시대(1940년대)의 모든 영광을 향유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이후 ‘만화 규율 위원회’의 규제에 따라 어두운 범죄투사의 이미지를 억지로 벗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의 색깔을 잃은 배트맨은 급격히 인기가 추락한다(2). 하지만 80년대 극적인 반전이 일어난다. DC 출판사가 슈퍼히어로 세계를 새롭게 정리하는 과정에서, ‘프랭크 밀러’, ‘앨런 무어’ 같은 재능 넘치는 작가들이 <배트맨> 작품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배트맨 이야기는 <다크나이트 리턴즈>, <배트맨 이어 원>, <킬링 조크>등을 연달아 내놓으며, 만화를 진지한 평론의 대상으로 격상시킨다. 특히 슈퍼히어로 존재에 진지한 질문을 던진 <다크나이트 리턴즈>는 그래픽노블이라는 용어를 성인 대중에게 확실히 각인시킨다. 지금 소개할 <배트맨:아캄 어사일럼>도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광기로 가득한 ‘아캄 수용소’에 초대된 배트맨. 그는 이제 무의식의 세계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대면한다.배트맨 모습

 

광기의 공간, 고담과 아캄 수용소

<배트맨>과 다른 슈퍼히어로 작품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는 ‘광기’다. <배트맨>의 많은 악당들은 부와 권력에 욕망하기보다 광기에 집착하다. 심지어 ‘배트맨’ 역시 어느 정도 이 광기의 자장 안에 놓여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커’라는 존재가 <배트맨>의 본질을 관통한다. ‘무질서의 군주’ 조커는 도덕과 이성이라는 좁은 개념 안에 갇혀 있지 않는다. “그는 어떤 날에는 장난기 많은 어릿광대가, 또 어떤 날에는 사이코패스 살인자가 된다. 그에게 진정한 인성은 없다.”

트라우마 1

이 같이 <배트맨>의 많은 인물들은 미쳤거나 아니면 어느 정도 미쳐 있다.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고양이가 나직이 건네는 말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미쳤으니까”처럼. 또한 <이상한 나라 앨리스>의 ‘여기’처럼 <배트맨>도 광기를 추동하는 근원적 뿌리인 ‘고담’이 존재한다. ‘고담’이라는 도시는 ‘공격’, ‘불안’, ‘분노’와 같은 병리적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가지며, <배트맨> 등장인물의 존재 방식을 지배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아캄 수용소’가 있다. 이곳은 원래 배트맨에게 체포된 정신질환 범죄자들을 치료하기 위한 공간이다. 하지만 ‘아캄 수용소’는 아이러니하게도 목적과 달리 그들의 광기를 끝없이 증폭시킨다.

 

아캄가의 몰락

<배트맨: 아캄 어싸일럼>은 ‘아머데이어스 아캄’ 박사가 머물렀던 과거의 아캄 수용소와 ‘배트맨’이 이제 막 들어서는 현재 아캄 수용소의 이야기가 맞물리며 진행된다. 먼저 ‘아캄’ 박사의 이야기를 들여다보자. ‘아캄 수용소’는 원래 ‘아캄’이 유년시절 거주하던 주택이다. ‘아캄’은 이곳에서 정신질환을 앓은 어머니와 함께 살며, 어둠의 흔적들을 감지하곤 한다. 이후 성인이 된 아캄은 다시 옛집으로 돌아온다. 과거의 기괴한 악몽이 다시 꿈틀거린다. 아캄의 내면 또한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간다. 그는 어두운 통로를 거닐 때마다, “자신의 움직임이 점차 한 편의 발레로 공식화되며, 자신이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생물학적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결국 괴물이 된 ‘아캄 수용소’는 ‘아캄’을 집어삼킨다. 아캄은 독백한다. ‘여기서는 무슨 일이든 가능하고 광기는 나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모조리. 또 완전하게. 나는 아캄이다. 집에 돌아왔다. 내가 속한 곳으로.” ‘아캄’ 박사는 이렇게 아캄 수용소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자신의 유산이며 운명인 광기에 용해되어 간다.

아캄박사 3

 

배트맨,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서다

한 세기 후, ‘아캄 수용소’는 여전히 음울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다. 아니, 수많은 광인들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광기의 농도는 오히려 더욱 짙어지고 있다. 이곳에 조커가 있다. 그는 4월 1일 만우절, 수용소를 장악한다. 그러고는 인질을 풀어주는 조건으로 배트맨을 요구한다. 배트맨은 아캄 수용소, 즉 ‘깊이를 알 수 없는 기호의 세계’인 무의식 세계에 초대된 것이다. 배트맨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는 아캄 수용소로 들어간다.

이제 곧 배트맨의 눈앞에는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초현실주의 공간이 펼쳐진다. 화면을 가득 채운 기하학 이미지는 아캄 수용소를 물리적 공간에서 심리적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배트맨의 모습 또한 불안한 개인 심리를 반영하듯 왜곡되고 뒤틀려 있다. 배트맨은 이곳에서 자신의 무의식과 대면한다. 그리고 그의 기이한 경험들은 포토몽타주 기법으로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이미지, 즉 현실에서 분리된 파편으로 재현된다.

기하학 3

‘아캄 수용소’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세계는 명확히 구분되지 않다. 정상인일지라도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자신이 정상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다. 배트맨 역시 예외가 아니다. 사실 그는 아캄 수용소 수감자와 먼 거리에 떨어져 있지 않다. 배트맨은 어린 시절 부모가 살해되는 사건을 경험한다. 또한 성인이 된 후에는 브루스 웨인과 배트맨이라는 이중의 정체성에 기대고 있다. 즉, 그는 조커처럼 폭력 속에 태어났으며, ‘어느 재수 없는 날’ 평범한 사람에서 근본적으로 변형된 결과물이다(3). 배트맨은 그래서 병원에 들어서기 전, 고든 국장에게 자신의 불안을 내비친다.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다만 내가 겁나는 거지. 나는 조커가 나를 제대로 볼까 겁이 난다네. 가끔 나도…내 행동의 합리성에 의문이 드니까. 아캄으로 들어가서 내 뒤로 문들이 닫힐 때마다 말이네…. 그럴 때면 마치 집에 돌아온 기분이거든.”

 

진정한 ‘슈퍼히어로’로 거듭나기

‘아캄 수용소’는 서양 이야기에 등장하는 숲처럼 ‘빛’과 ‘그림자’라는 이중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곳은 자아를 위협하면서도 한편으로 이를 통해 자아를 변신시키고 재생시킬 기회를 제공한다(4). 그래서 아캄 수용소의 여정은 더 나은 자아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통과 의례는 배트맨이 아캄 수용소 미로를 헤맬 때 명확히 드러난다. 먼저 배트맨은 진주, 박쥐, 연발권총 등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통스럽게 대면한다. 그리고 이 후 그는 심층으로 내려가 현실에서 존재할 수 없는 용의 이미지를 가진 괴물과 맞서 싸운다. 용은 속박된 ‘자아’를 상징하며, 이를 무너뜨림으로써 더 나은 자아로 성장할 수 있다(5). 그래서 배트맨은 사탄 즉 용을 무찌른 성 미카엘 동상의 창을 뽑아들어 내면의 그림자인 용을 찌른다.용 3

마침내 아캄의 여정이 끝이 난다. 이제 배트맨은 아캄 수용소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매개로, 자신의 새로운 정체성을 재건한다. 즉 배트맨은 “자신의 개인적 심연과 직면하고, 자신의 심리적인 악마를 통합시키고, 더 강해지고 더 제정신이 되어서 거울을 통과해 저편으로 나온 것이다.” 음울한 아캄 수용소에 빛이 들어온다. 배트맨은 조커를 비롯한 범죄자들에게 수용소를 떠나라 말한다. 조커는 이에 유유히 아캄 수용소를 걸어 나간다. 그러고는 배트맨에게 다정히 말을 건넨다.

 

“다만 잊지 말라고 혹시 그쪽 생활이 너무 힘들 때면, 여기에는 항상 자네 자리가 있다는 걸.”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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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0년대 미국의 상황. 이후 내용 역시 미국 만화 산업을 중심으로 전개하겠다.
2) 배트맨의 탄생,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75&contents_id=10639&series_id=13
3) 마크 D. 화이트, 로버트 이프 엮음, <배트맨과 철학>
4) 로리 램슨 엮음, SF, 판타지, 공포
5) 조셉 캠벨, <신화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