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수평선 너머 무엇이 있을까?_ 스티븐 콜린스의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

 

하얀 뒤표지에 검은 별 5개가 총총 박혀 있다.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에 대한 출판사 자체 평점이다. 근거 없는 평가는 아니다. 실제 평점 아래 작품 수상 경력이 당당히 나열되어 있다. 수상 경력은 그 자체로 주목할 만하다. 다만 보다 놀라운 사실은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가 작가 스티븐 콜린스(Stephen Collins)의 첫 번째 그래픽노블이라는 점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스티븐 콜린스는 신인 작가가 아니다. 그는 이전에 이미 ‘카투니스트’와 ‘일러스트레이터’로 왕성히 활동했으며, 현재 <가디언>에 카툰을 기고하고 있다. 영미, 유럽권에서는 만화가, 카투니스트, 일러스트레이터를 오가는 작업이 활발한데, 가령 같은 영국 출신 <마담 보베리> 작가 ‘포지 시몬즈(Posy simmonds)’ 역시 유사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카투니스트와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다가 그래픽노블 작가로 자신의 영역을 확장한다. 그래픽노블은 이렇게 ‘이미지’라는 공통분모를 통해 만화, 카툰, 일러스트 장르의 특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래픽노블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 역시 그렇다. 카툰의 풍자, 일러스트의 작화, 만화의 칸 배열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작품 내 공존한다.

 

Stephen Collins cartoon 21 June 2014
가디언 카툰 (링크 포함 )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의 ‘우화’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의 주인공은 당연히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다. 하지만 진정한 주인공은 그가 머물고 있는 세계다. 작품 첫 페이지는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뿜는 세계 지도가 펼쳐져 있다. 이 세계는 ‘여기’와 ‘저기’로 나누어져 있다. ‘여기’는 매우 큰 섬으로, 완벽히 정돈된 세상이다. 거리도, 건물도, 심지어 사람들의 모습과 행동까지도…. 반면 ‘저기’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혼돈과 무질서 그 자체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다만 ‘여기’를 둘러싼 바다 너머, 그 어딘가 존재한다. ‘여기’와 ‘저기’는 대립한다. 그리고 그동안 억눌러왔던 ‘저기’의 힘이 분출되면서, ‘여기’는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다. 즉,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는 변화를 거부하는 사회에 대한 ‘우화’다.

지도

 

주인공 ‘데이브’는 ‘저기’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 혼란과 무질서가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다. 그래서 그는 매일 밤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을 반복해 들으며, 질서 있게 정렬된 동네를 스케치한다. 일상의 질서를 자신의 귀로,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불안 1

 

지금까지는 모든 것이 완벽하다. 발표를 앞둔 시점이다. 여느 때같이 데이브는 자료를 설명하기만 하면 된다. 갑자기 자료가 엉켜 보인다. 그러고는 ‘포효하듯 검은 불길이 얼굴을 뚫고 나오는’ 느낌을 받는다. 기괴하게도 턱수염이 엄청난 속도로 자라기 시작한 것이다. 동일한 직사각형으로 나열된 세계가 일렁인다. 당황한 데이브가 수염을 자른다. 소용없다. 수염은 더 질기게, 더 빠르게 자랄 뿐이다. 이제 수염은 건물 밖으로까지 흘러내린다. 시커먼 수염의 소용돌이는 “위가 아래고, 오른쪽이 왼쪽이고, 안이 바깥이다. 어디에서 끝이 나는지조차 알 수 없다.” 거대한 수염은 무질서가 된다.

 

수염 시작수염 발전 1

 

무질서, 변화의 다른 이름

‘저기’로 상징되는 거대한 수염은 ‘여기’를 변화시킨다. 먼저 수염을 구경 온 사람들을 보자. 질서 있게 줄 서던 사람들이 점점 무질서하게 흩어진다. 그리고 ‘평소에 가장 깊은 곳에 묻혀 있던 무시무시한 악몽이 수면으로 올라오는 느낌’을 받는다. 이뿐만 아니다. 정부가 미용사를 동원해 수염의 움직임을 막으려 할 때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항상 유지하던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 시작한다. 미용사가 모두 동원되어, 스스로 머리를 잘라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람들은 항상 가던 길 대신 새 길을 걷기 시작한다. 예전 길이 통제되어, 이제는 다른 길을 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작은 변화가 더 큰 변화로 이어진다. 그리고 세상은 변한다. 물론 처음부터 변화가 온전히 받아들여졌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변화를 두려워 한 사람들은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 ‘데이브’를 풍선에 실어 하늘로 날려버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번 촉발된 변화는 비가역적인 것이 된다. 사람들은 이제 자신의 개성을 긍정하고, 새 길을 찾아가는 즐거움을 깨닫는다. 더 이상 그들은 ‘저기’를 두려워 않는다. ‘여기’에는 이미 ‘저기’가 있다.

변화 3

 

<거대한 수염을 가진 남자>는 끊임없이 자라는 수염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입체적이지 않다. 그가 겪고, 만들어낸 상황들이 단순하다는 말은 아니다. 카프카의 <벌레>처럼 그 역시 실존과 부조리의 문제에 깊이 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거대한 수염>은 우화이고 이에 주인공은 철저히 우화에 복무한다. 그의 수염은 무질서가 되어 변화를 거부하는 획일적인 ‘여기’를 변화시킨다. 하늘로 올라가기 직전, 그래서 그는 어지럽게 얽힌 자신의 수염을 보며 ‘아름다워’라 말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역할을 완수한 채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마지막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