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일상에 특별함을 담다_ 존 맥노트의 <가을>

그런 날이 있다. 어스름이 깔린 거리를 혼자 걸을 때, 알 수 없는 기분이 자신을 감싼다. 항상 지나쳐왔던 거리는 생경하고, 움직임 하나하나는 어느 때보다 또렷하다. 이 체험의 순간은 일상을 낯선 세계로 안내하고 또한 자신의 내면을 새삼스레 들여보게 한다. <가을>은 그런 날을 담은 작품이다. 고요한 작은 마을이 놓여 있다. 가로수마다 붉게 물든 단풍이 가득하다. 풍성한 가을, 다람쥐는 한층 더 분주하다. 세계 내 사람들 역시 평범한 일상의 순간순간을 담담히 수행한다. <가을>은 일상의 풍경을, 가을의 풍경을 담고 있다.

 

일상에서 가을까지

<가을>은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요양원 주방보조로 일하는 청년이, 2부는 잡지 배달하는 청년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두 사람은 극적인 사건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두 사람 내면 또한 큰 흔들림 없이 고요히 흐른다. <가을>은 두 청년의 삶을 깊이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 보다 관심을 기울이는 건 그들을 통해 구현되는 일상의 순간이며, 더 나아가 그 일상을 둘러싼 가을 풍경과 분위기다.

버스 창에 기대 졸고 있는 주인공 뒤를 따라가보자. 그는 요양원 창고에서 옷을 갈아입고 조리실로 들어선다. 특별한 사건은 없다. 접시를 씻고, 감자껍질을 벗기고, 그릇에 요리를 담는 주방 보조원의 일상이 단조롭게 나열된다. 이 과정에 대화는 없다. 대신 라디오의 음악소리와 ‘탁탁’, ‘달가닥’같은 일상의 소리가 대화를 대체한다.

작품의 관조적 분위기는 주인공과 가을 풍경이 교차될 때 보다 분명해진다. 작품의 시선은 주인공에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어떤 때는 담벼락에 뛰어다니는 다람쥐를 쳐다보다가, 또 어떤 때는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를 바라본다. 물론 시선이 다시 주인공으로 향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때조차도 애써 주인공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저 저만치 떨어져 있는 주인공을 바라볼 뿐이며, 그 모습은 그 자체로 가을 풍경이 된다.풍경 1-1

풍경 1-2

 

그림이 시가 될 때

시와 산문의 차이를 말할 때, ‘시’를 ‘무용’에 ‘산문’을 ‘보행’에 비유하곤 한다. 산문은 보행과 같이 명확한 하나의 대상에 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반해, 시는 무용과 같이 그 행위 자체를 궁극적인 목적으로 한다. <가을>은 이러한 관점에서 산문보다는 시와 더 닮은 작품이다. 내용적으로 주제나 인물의 변화보다, 평범한 일상과 그것을 둘러싼 세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반복 칸 1-1

또한 <가을>은 작화의 측면에서 시적인 특성이 도드라진 작품이다. 정제된 색상이 환기시키는 아려한 분위기는 시적인 정서를 제공한다. 판화 형식의 간결하고 평면적인 그림은 함축적인 시어를 연상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반복적 칸 배열은 이 작품에 시적인 운율을 만들어낸다. 6개의 행으로 규칙적으로 나열된 칸은 작품 고유의 흐름과 리듬을 만든다. 그래서 이야기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자신만의 흐름으로 조용히 흘러간다. 또한 칸 배열이 풍경을 조망한 원경과 움직임을 포착한 근경이 교차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경우 앞의 예시와는 또 다른 시적 운율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원경근경-1

칸이 만든 운율은 단지 한 페이지 내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아래 그림에서처럼, 첫 페이지는 하나의 ‘연(聯)’을 연상시키는 큰 칸과 4개의 행(行)으로 구성된 작은 칸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구성은 다음 페이지에서 동일하게 반복된다. 이 같은 대칭적 구성은 반복을 통한 안정감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변화된 색상과 풍경을 통해 보다 풍부한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한다.

햇빛이 오래 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오래 만지작거린 하늘
새들이 날아간다
빈 하늘이 날아가 버리지 못하게
매달아 놓은 추처럼

황인숙 시인의 시 <다시 가을>의 한 구절이다. 가을 풍경, 햇살과 바람과 하늘은 생소한 것은 아니다. 항상 존재하지만 바쁜 생활 속에서 놓치게 되는 일상의 순간이다. 어쩌면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이 같은 일상의 작은 경험일지 모른다. 그래서 <가을>은 평범한 일상을 통해 사소하지만 무엇보다 소중한 가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차분히 펼쳐진 <가을>의 각 장면은 스치듯 지나쳐버린 일상의 아름다움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