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에마논_표지

 

박상준의 일본 SF 다이어리

ㅡ츠루타 겐지의 <추억의 에마논>

 

이야기 이어가기 놀이를 해 보자.

싱글 남성이자 SF 애독자인 당신은 훌쩍 떠난 여행에서 우연히 젊은 여성을 알게 된다. 좀 불량소녀 이미지인데다 묻는 말에 대꾸가 없기 일쑤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묘한 매력에 빠져들게 된다. 그런 그녀가 말한다.

“SF 팬이군요? 그럼 어떤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도 받아들일 유연한 사고의 소유자겠네?”

자, 이다음에 그녀는 무슨 이야기를 할까?

추억의 에마논_만남

 

이 여자는 자기 이름이 에마논(Emanon)이라고 한다. 영어로 ‘노 네임(no name)’을 거꾸로 한 것이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역사부터 문화, 정치와 경제, 스포츠, 과학 등등 모르는 것이 없다. 그러다가 문득 입을 다물고 얼굴이 심각해질 때가 있다. 지금 어디 가는 길인지, 나이가 몇인지 물을 때이다.

…어렵게 에마논은 자신을 말한다. 지구 생명의 탄생부터 지금까지 30억 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어머니에서 딸로, 인간으로서 육신은 계속 바뀌지만 기억은 조금도 잃는 일 없이 삶의 경험들이 그대로 더해져서 이어진다고. 때가 되면 방랑의 길을 떠나고, 그러다가 남자를 만나 딸을 낳으면 그 갓난 아이가 다시 에마논이 되고, 엄마는 텅 빈 껍데기가 되어 잊히고 사라진다고.

추억의 에마논_정체

에마논은 자신이 왜 이렇게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도대체 자신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어째서 그 엄청난 기억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지. 이젠 지쳤다고도 말한다. 당신은 SF 팬답게 우주와 지구의 관점에서 열심히 가설들을 내놓는다.

“인류의 새로운 영적 진화를 위해 때를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일종의 방아쇠 역할을 하기 위해 말이지.”

하지만 맥주에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그녀는 다시 말한다.

“어때, 내 이야기 SF 만큼 독창적이었어? 아하하….”

당신은 그렇게 불량소녀의 말장난에 놀아났다고 여겼지만, 다음날 그 여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방랑의 에마논_표지

<추억의 에마논>은 원래 SF 작가 카지오 신지가 쓴 소설을 츠루타 켄지가 만화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츠루타 켄지는 펜선만을 고집하는 독보적인 스타일의 작화가로 유명하다. 작업 속도가 느려 작품이 얼마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광적인 팬 층을 거느리고 있다. 80년대에 나왔던 원작을 만화로 각색해 내면서 새로운 붐을 일으켜 원작과 만화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는데, 원작은 아직 번역되지 않았지만 만화는 <추억의 에마논>에 이어 속편인 <방랑의 에마논>까지 한국판이 나와 있다.

에마논의 이야기는 몇몇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아녜스 바르다의 영화 <방랑자>나 리처드 쉔크만의 영화 <맨 프럼 어스>. 만화 <피터 히스토리아>의 주인공도 에마논과 비슷하다. (<피터 히스토리아>는 어린이 교양만화라는 딱지 때문에 저평가된 숨은 걸작이다! 꼭 일독해 보시길 강력 추천한다.) 모두 다 일종의 관조적 아웃사이더들이 등장하는, ‘미시적 삶의 거대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드는 수작들이다.

만화 속 등장인물을 현실에서 딱 한 사람만 만나볼 수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에마논을 꼽겠다. <추억의 에마논> 남주인공도 그랬다. 그로부터 13년이 흐르고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일상을 살던 중에 정말 우연히 에마논과 마주친다. 하지만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대신에 그녀의 어린 딸이 눈을 빛내며 다가온다. “날 기억하고 있었구나. 고마워.”

그 짧은, 기묘한 재회를 끝내고 다시 헤어지며 에마논이 고하는 작별, 볼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가 뭘까.

추억의 에마논_재회이별

에마논은 흔히 지구를 상징하는 신격인 가이아(Gaia)나 ‘머더 어스(mother earth)’와는 다른 존재이다. 가이아의 품 안에서 태동한 ‘생명’의 대변자이다. 에마논은 얼핏 보기엔 ‘중년 SF 팬 남성의 판타지’라는 시니컬한 시선을 받기 쉽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의미심장한 레토릭을 담고 있다. 미토콘드리아로 이어지는 모계 유전이라는 과학적 함의 못지않게 인간중심주의를 벗어나서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 모든 주제들이 츠루타 켄지의 그림과 참 잘 어울린다. 너무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다.

<추억의 에마논>은 삶을 살아 낸 연륜이 쌓일수록, 그러면서 세계와 우주에 대한 의문을 계속 키워 온 사람일수록 와 닿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 거대한 의문 앞에서 좌절을 예감하는 사람에게 선물같이 다가갈 수 있는 작은 위안이다. 지구 생명의 윤회라는 업을 온몸으로 지고 사는 여인. 현실에서 에마논을 만나고 싶다.

 

 

예고 : ‘일본 SF만화 다이어리’에서 앞으로 얘기할 작품들

콘 사토시의 <세라핌>
야마구치 타카유키의 <만용인력>
오치아이 나오유키의 <철인>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예전에 장르문학 전문잡지 [판타스틱]의 창간 편집장과 SF전문출판사 [오멜라스]의 대표를 맡은 적이 있다. SF전문가 코스프레로 살아가는 오덕이라는 의혹이 있다. 일본 SF만화의 꽤 열렬한 팬이며 그런 배경을 믿고 [critic M]의 편집위원단에 겁 없이 끼어들었다. 초등학생 딸에게 SF만화를 마구 권한 결과 순정만화를 보지 않으려는 부작용이 나타나 당황하는 중이다. 가급적 오래 살고 싶은데 그 이유는 변화하는 세상의 모습이 과연 어디까지 SF스러워지나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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