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난 누구인가 <아이덴티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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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리어왕은 자신을 규정하고 신봉했던 선과 악, 사랑과 충성으로 이뤄진 세상이 무너지자 이렇게 외치다가 결국 광인이 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나 자신을 구분하는 내부와 외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은 다양한 문학과 영화, 만화의 소재로 널리 애용됐다. 이중인격 심리를 다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지킬박사와 하이드>부터 20세기에 영화적 기술뿐만 아니라 사상적 흐름에도 영향을 미친 워쇼스키 남매의 <매트릭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이와아키 히토시의 <기생수>는 무엇이 인간을 정의하며 나를 나 자신으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게 무엇인지 질문한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다중인격 장애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와 웹툰이 큰 관심을 모으는 중에 네이버 웹툰에 연재중인 시니 작가와 수훈 작가의 <아이덴티티>는 독특한 관점으로 심리적 장애를 그리고 있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남자’로 불리는 백만장자 사업가 헨리 모리스는 사람들로 가득한 파티에서 닥터 와이번에게 곧장 다가가 인사한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을 치료해달라고 부탁한다. 닥터 와이번은 그 자리에서 헨리가 다중인격 장애를 앓고 있단 걸 맞추지만 헨리는 초면인 닥터 와이번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며칠 후 닥터 와이번은 진료실에서 헨리의 뇌 사진을 보여주면서 헨리의 진심을 깨닫고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인사를 나눈다.

 

[그림2]진지하게 인사하는 닥터 와이번과 헨리

 

이야기 속 헨리의 다중인격은 헨리의 자아에서 분열된 인격들이 아니다. 9살부터 잠이 들면 완전히 다른 사람들의 꿈속으로 들어가 타인의 인생을 인식하고 대신 꿈을 꾼다. 이렇게 경험하게 된 타인의 인생들은 국적, 인종, 남녀노소를 초월해서 수천 명에 이르렀고 본래 헨리의 자아를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다. 타인과의 과도한 교감과 의식의 연결이 헨리의 자아를 상실시키는 원인이 된 것이다. 이런 설정은 타인과 몸은 바뀌었지만 남겨진 의식으로 발생하는 해프닝이 이어지는 스토리 패턴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10화에서 보여주듯 헨리의 의식 대신 다른 사람이 헨리의 몸 안에서 깨어나기도 한다. <아이덴티티>는 정신적으로 불완전한 두 사람의 대화와 심리적 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이끈다. 헨리만큼 닥터 와이번 또한 심각한 불안 증세로 오랫동안 괴로워한다. 아내를 사랑하는 만큼 생기는 이별의 두려움이 그를 점점 아내와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닥터 와이번은 이 말 못할 고민을 꿰뚫고 있는 헨리와 거리를 두려 하지만 조금씩 그의 증세가 심각하게 드러나면서 환자가 아닌 인간이자 친구로서 헨리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닥터 와이번은 헨리의 몸 안에서 전혀 다른 사람의 의식으로 깨어난 헨리를 마주하면서 그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현실이 가까워졌다는 걸 알게 된다. 다행히 헨리의 자아가 돌아왔지만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는 의심을 남기면서 독자들은 지금 헨리를 헨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에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또한 닥터 와이번이 가진 복잡한 불안증세가 어떻게 발전해서 이야기에 영향을 미칠지에 관심이 모아진다. 본래 자아 분열로 비롯되는 다중인격 장애와는 달리 헨리는 수많은 타인과의 무의식적인 접촉으로 자아 실종에 이르는 위험에 처한다.

 

[그림3]자아를 잃어버린 헨리

 

닥터 와이번 또한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쌓인 심리적 불안감을 억누르며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빠진다. 둘 다 과거의 상처에 비롯된 고통스런 기억으로 인해 현재의 인간관계를 제대로 형성하지 못한 까닭에 엄청난 내면의 파괴에 다다르는 것이다. 헨리는 너무 많은 타인과 의식이 연결되어 자아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닥터 와이번은 이별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철저히 외부와 고립시킨다. 그럴수록 두 사람은 서로와 이어진 심리적 교감 속에서 좀 더 깊게 내면을 바라보면서 치유의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개성 있는 주변 인물이나 극적인 갈등 관계없이 인물의 대화와 심리변화 중심으로 이어지는 ‘아이덴티티’는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단조로운 분위기를 독특한 화풍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검은 바탕에 무채색에 가까운 컬러 톤과 거칠지만 따뜻한 질감이 묻어나는 터치로 불완전하고 위태로워서 더 인간적인 인물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죽음에 관하여’와 ‘네가 없는 세상’으로 잔잔하지만 흡입력 있는 스토리로 이름을 알린 시니 작가의 장점과 인물 간의 심리상태와 관계를 단순하지만 독특한 그림으로 표현한 수훈 작가의 특징이 잘 어우러졌다. 비록 현재까지 19화까지 공개되어 이야기의 절반 정도만 드러난 듯 한 시기에 헨리의 자아 찾기와 닥터 와이번의 심리변화와 예상치 못한 반전이 기대된다.